‘파란만장한’ 청소년기를 보낸 아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드디어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다. 마침 중국 조기유학 체험을 담은 책을 내보자는 출판사가 있어 우리 모녀가 겪은 조기유학의 수많은 시행착오와 그로 인한 고통이 재현되기를 원치 않는 마음으로 책을 준비하게 되었다. 조기유학의 고통은 한국에 돌아온 뒤에 오히려 더 절절하게 겪어야만 했다. 당사자인 아이가 대입 전의 한가한 시간을 이용하여 지난 중국 유학시절과 한국 복귀 후의 그 다사다난한 시절을 거칠지만 나름대로 정리하였다.
나는 아이가 써놓은 글을 보고 내가 알고 있던 것 이상으로 아이가 훨씬 더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음을 새삼 알게 되었다. 중국어 공부라는 명분으로 아이에게 한 내 몹쓸 짓들을 정당화하며 아이에게 얼마나 켜켜이 그리고 폭넓게 상처를 만들었는지 아프게 확인해야만 했다. 사실 상처는 아이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어서 내게 있는 상처는 한국에 온 뒤 서서히 아물어 이제는 딱지마저도 사라진 과거라고 생각했었다. 아이의 글을 보고 나니 그 상처가 시간을 거슬러 딱지가 떨어지고 덧들려 새로운 생채기가 되는 것 같았다.
총 3년 반에 걸친 초중고 세 번의 유학과 세 번의 한국 복귀. ‘세 번의 유학’에 함축되어 있는 실체는 찢어진 학창생활이라는 ‘폭력’이 아니고 그 무엇이겠는가. 대학 면접시험에서 면접관이 중국어 배운 내력을 물어 간단히 ‘세번의 유학’에 대해서 설명하니 그 교수 왈 어린 학생이 정말 파란만장하게 살았네요, 하더란다. 애에게 이런 '폭력'을 저지른 어미가 이렇게 무사할 수 있는 건 억세게 좋은 운이나 지독한 뻔뻔함 덕분이겠지.
그래, 처음 한번만 자발적인 선택으로 감행했고, 나머지 두 번은 어쩔 수 없는 상황 탓이었다고, 그래도 그 덕에 중국어는 배우지 않았냐고 변명할 수는 있겠지. 그러나 아무리 변명해도 ‘세 번의 유학’에 담긴 폭력성이 희석되지는 않을 거다. 아이가 중국에서 얼마나 공부했어요? 이렇게 물으면 나는 3년 반은 큰 소리로 말할 수 있었으나 그것이 세 번에 걸쳐 이루어졌다는 말은 작게 작게 해야만 했다. 사람들이 ‘세 번’에 담긴 그 폭력을 읽어낼까 두려웠던 것이 바로 그 폭력을 자인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며칠 전에 고교 3년 생활기록부를 보고 처음으로 아이의 학교성적을 정확히 알았다. 1학년 1학기 한국 고등학교 때 성적이 중국어, 영어 외에는 고루 바닥인데 특히 그중 언어영역은 123명 중 123등이었다. 아이는 웃으며 말했다. 엄마, 그 123등도 그냥 123등이 아니야. 다른 아이들은 모두 80점이 넘어갈 때 혼자만 40점 50점 받은 123등이야. 전교생이 다 그만그만한데 나 혼자만 저 밑에 떨어져 있는 나 홀로 꼴등이었어.
아이는 그렇게 담담히 말했다. 아니 웃으며 말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연일 국제전화로 꺼이꺼이 울음을 삼키던 고통의 정체를 나는 이제서야 적나라하게 확인한 것이다. 아이는 체험기에 그렇게 썼다. 아이들이 모두 ‘쟤는 중국어만 잘 해’ 하고 등 뒤에서 흉보는 것 같았다고, 대한민국에서 공부를 못하는 고등학생이란 이렇게 비참한 것이구나라고.
그때 아이는 시험만 보면 울었었다. 엄마, 엄마. 말없이 국제전화에 대고 울음을 삼키는 아이를 보다 못해 애아빠와 상의 끝에 또 아이를 다시 중국으로 데려왔다. 그래 여기 와서 한 해 더 보충하는 거야. 그러나 그것도 쉽지 않았다. 중국 아이들 속에서 힘겨워하며 오히려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는 아이와 나는 최악의 시기를 보내야만 했다. 급기야 학교에는 적만 걸어놓고 학원으로 가서 지가 원하는 과목을(물론 선택의 폭이 극히 제한되어 있었지만) 공부하라고 했었다.
사스 덕분에 일찍 한국으로 아이를 되돌려 보내고 나는 다시 말했다. 학교만 다녀주면 돼, 안 다니겠다고만 하지 않고 다니기만 해주면 돼, 중국에서처럼 그렇게 말했다. 한국에 알려지지 않는 중국학교 부적응 유학생들이 의외로 많은 것을 목도한 나는 중국에서 초등학교 중학교를 다닐 때 그렇게 말했었다. 그저 학교만 다녀주면, 안 다니겠다고 절망하지 않고 다니기만 해주면 돼. 그 ‘학교만 다녀주면 돼’를 한국 고등학교에 복학시키며 다시 수없이 되풀이한 것이다. 학교를 다니기만 할 수 있으면 넌 성공이야.
복학해서도 아이는 여전히 해결 못한 성적을 과제로 안고 있었지만, 갑자기 선배가 되어버린 동급생과 동급생이 된 후배 사이에서 존댓말 문제로 또 예상치 않은 홍역을 겪어야만 하였다. 후배들 앞에서는 존댓말을 해달라는 이제는 선배가 되어버린 동급생의 부탁을 듣고, 어둠 속에서 반애들과 체육대회 준비 에어로빅을 하며 혼자서 눈물을 흘리는 아이의 모습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세 번의 유학’에 담긴 폭력의 정수는 그 ‘중국어만’을 위해서도 얼마나 많은 탐욕을 부려야 했는가에 있다. 못 알아듣는 학교 수업에 시달리는 애가 못 알아들어 과외를 많이 할 수 없는 처음 한 두 달만 빼고 나머지는 그야말로 과외와의 싸움으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하나도 못 알아듣고 못 쓰면 학교에 다닐 수가 없잖아. 받아쓰기 시험에 계속 핀인(발음기호)만 쓸 수 없잖아. 다른 아이들이 다 쓰는 일기를 너만 못 쓰면 안 되잖아. 다른 아이들이 다 읽은 책을 너만 안 읽으면 안 되잖아. 중국어가 늘면 늘수록 수준에 맞춰 과외는 오히려 더 늘어나기만 했다.
급기야 애는 소리쳤다. 내가 과외하는 기계야? 그래, 엄마도 안다. 니가 과외 하는 기계 아닌 줄 안다. 근데 어떻게 해? 안 하면 못 따라 가는 걸. 안 하면 학교 가서 못 알아듣는 걸. 평생 그만큼 떨어진 채로 살아야 하는 걸. 아무도 나처럼 과외 하는 애 없어. 걔네들은 중국 아이들이니 중국어 배울 필요 없잖아. 걔네들은 한국어도 안 배워. 나만 왜 중국어 배워야 돼? 너는 중국 살잖아. 그럼 한국에 다시 가면 되잖아. 걔네는 한국 안 가는데 나만 왜 중국 와서 맨날 과외 해야 돼?
우리는 중국처럼 큰 나라 아니잖아. 아니, 중국인이라도 미국인이라도 이제 세계가 하난데 살아남으려면 외국어·외국문화를 배워야 해. 남들 눈으로 세상을 보지 않고 니 눈으로 세상을 보고 살려면 외국어를 배워야 해. 나라가 작고 크고가 문제 아니야. 이것이 외국어를 배우는 합당한 논리인지 아니면 고슴도치 새끼 어미의 논리인지 모르겠다.
며칠 전에 아이는 방바닥에 배를 깔고 엎어져서 엄마, 고등학교 때 내가 사귄 친구가 얼마나 되는지 볼래? 그러더니 하나하나 호명하며 손가락을 꼽기 시작했다. 거의 열 손가락 가까이 꼽더니 나를 올려다보았다. 어때? 이만하면 나 고등학교 생활 성공이지? 하는 눈빛으로.
그래 초등학교 때도 수없이 전학을 다녔고, 국내 전학도 모자라 중국으로 1년 반 동안이나 옮겼었지. 그리고 돌아와 1년 반 후에 중학교는 통째로 중국에서 보냈으니 한국에 무슨 친구가 있었겠니. 공부를 못해도 친구 재미로라도 학교에 재미를 붙이고 다녀주기를 얼마나 빌었는가. 다녀만 준 것도 성공인데 친구가 열이 다 되면 정말 성공한 학창생활이지. 그래, 너 정말 한국 학교생활 잘 해냈다. 엄마 진짜 이제 마음 놓을 수 있겠다.
아이는 입학한 학교를 졸업도 하기는 처음이라며 한국에서 같은 학교를 졸업하게 해줘 엄마에게 감사한다는 말마저 했다. 하도 모진 엄마다 보니 그런 당연한 일에도 감사를 받는구나, 오히려 내 횡포를 다시 확인하는 거 같았다. 아이는 고등학교에 다니며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한국의 대학에 가게 해줘 감사하다는 말도 여러 번 했다. 엄마, 한국인으로 살면서 이런 것도 모르고 살 뻔했어. 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전화로 말하며 간혹 아슬아슬하다는 듯이 다 엄마 덕분에 이렇게 긴요한 것을 배웠다고 고마워했다. 평소에 모진 엄마로 살다보니 별 게 다 선행이 된다.
그래도 이번에 아이가 대학에 진학하면서는 엄마가 진짜 선행을 했다. 아이에게 원하는 학과 진학을 허용하고 축하해준 것이다. 원하는 학교는 아니었지만 아이의 희망대로 사회과학부를 갔으니 나는 비로소 제대로 된 선행을 한 것 같았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면 나는 아이에게 더 이상 폭력을 쓸 수 없게 되어 선행을 하고 만 것이지만.
나는 아이가 어미가 제대로 하지 못한 인문학을 정통으로 공부하기를 바랐다. 그냥 순수하게 인문학자가 되어 더디지만 세상 사람들의 삶에 좀 더 근본적인 기여를 해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런 기여 속에서 아이 자신도 행복해지기를 바랐다. 덤으로 지도교수를 비롯하여 세상에 늘 죄진 마음으로 사는 이 못난 어미의 빚도 제대로 된 인문학자가 된 아이가 상쇄해주길 바랐다.
그런데 아이는 인문과학이 아니라 사회과학을 하겠단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아이가 인문학 중에서도 국문학을 그것도 고전산문을 해주기 바랐다. 그런데 아이는 국문학이 자기 적성이 아니라며 일찌감치 거부했고, 그럼 중문학이라도, 하고 목매는 내게 중국어도 목적이 아닌 도구로 삼겠다며 중문학도 중국학도 거부하고 상의 없이 사회과학을 선택했다. 그러면 부전공이라도, 나는 최후까지 목을 맸으나 아이는 오히려 쿨하지 못한 어미의 미련을 자르겠다는 듯이 최종 선언을 하였다. 부전공은 사학을 하겠다고, 그리고 뭣보다 공부를 일차적 업으로 삼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자기는 학문보다 좀 더 현실적인 것을 하고 싶단다.
어렵게 중국유학을 시키며 은밀히 계획했던 것들이 모두 무산되는 허탈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아이는 엄마의 이 허탈감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게 되어서 그것도 원하는 사회과학대를 가게 되어서 너무 좋다고 잔뜩 흥분되어 있다. 그래, 이제 엄마가 너를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있겠니. 한 번 사는 인생, 그리고 니 인생인데 니가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야지. 니가 하고 싶은 전공을 공부하게 된 거 축하한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엄마의 선행을 생색낼 정도로 뻔뻔하지는 않았고, 솔직히 말하면 그 미련을 속에서 흔쾌하게 정리한 것도 아니어서 축하의 말이 가슴이 아닌 입에서 나올 뿐이었다.
대학에 가면 일본어 공부를, 한문 공부를 시키려던 엄마의 계획은 다 물 건너갔다. 어느 새 아이의 인생에 횡포를 부렸던 폭군에서 단순 조력자로 위상 변모를 하고 만 것이다. 적어도 ‘나 홀로 꼴등’이라는 그 힘겨운 조기 유학의 덫을 빠져나온 아이의 의지에 감사하는 것이 내 할 일이지. 그 힘든 여건 속에서 거의 열손가락이나 꼽아야 되는 친구를 만든 그 적응 노력에 감사해야지. 나는 분수에 맞게 폭군의 견인이나 선도를 포기하고 조력자의 몫인 격려를 해주었다.
과외하는 기계냐고 소리 지르던 아이가 대학 합격이 결정되고 말했었다. 다 엄마 덕분이야. 친구들도 그랬어. 너는 정말 엄마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니가 아무리 언어 재능이 있어도 엄마가 그렇게 용감하게 중국유학을 시켜주지 않았으면 어떻게 그런 중국어 실력을 갖출 수 있었겠느냐고. 엄마, 나도 그렇게 생각해. 엄마가 그렇게 모질게 나를 공부시키지 않았으면 이런 좋은 조건으로 대학갈 수 없었을 거야.
사실,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왠지 비난받아야 하는 잘못을 착오로 칭찬받는 거 같아 편치 않았었다. 중국에 데려온 거, 힘들어하는 아이를 과외선생과 방에 밀어 넣은 거, 커다란 선택과 작은 선택의 성과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가졌던 의구심으로 늘 불안하기만 했었다. 이 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내가 잡은 키가 아이를 과연 희망의 나라로 데려가는 것인지.
그 의구심이 가져오는 불안감은 애가 새로운 고통을 만날 때마다 다른 색깔로 나를 괴롭혔다. 그러나 고정된 별을 보고 갈 수 없는 세상에서 어느 별을 보고 가는 게 정도라고 과연 누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는가. 아이를 어느 방식으로 교육 시켜도 불안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시대이다. 이미 와버린 길, 그 길에 대해 후회보다 긍정을 하는 것이 앞으로 나가는데 힘을 얻는 것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니가 엄마에게 진정으로 감사할 정도로 중국 유학과 그 성과를 긍정적으로 수용했다면 그것으로 유학의 성과는 충분하다.
조기유학의 성취와 그로 인한 좋은 추억이 있다면 그것이 삶의 힘이 되길 바란다. 그러나 그 성취와 좋은 추억이 니가 기록한 수많은 고통의 소산이라는 것도 또한 잊지 마라. 엄마는 아직 니가 중국 유학에서 고통의 크기 만큼 성취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고통의 크기와 성취가 비례하지 않을 거라 겁먹지 말고 원하는 바가 있으면 고통과 노력을 아끼지 말거라. 중국 조기 유학의 진정한 성과는 겁먹지 않고 원하는 바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거, 바로 그거 아니겠니.
딸아, 한국 대학 입학을 다시 한번 축하한다. 원하는 전공 선택을 다시 한번 축하한다.
* 이 글을 아이 교육을 위해 고민하는 학부형님들께 드립니다. 다른 모든 어머니들과 같은 고민을 제 일과 연결하여 중국 조기유학으로 풀어보았지만 어떻게 해도 교육 내용과 방식에 대한 확신을 갖기는 힘든 것 같습니다. 그냥 또 하나의 사례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작성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