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진보인가, 무엇이 진보인가 ........... 윤 학(변호사) -"업코리아"에서 펀글.
봄날 누군가와 거닐며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k교수와 점심약속을 했다.
아름다운 교정의 봄볕을 즐기고 있는데 k교수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한 학생이 “요즘 어렵게 공부하여 고시에 합격,
몇 십 년 열심히 공직생활을 해도 빛 보기가 어렵다.
그러나 운동권에서 활동하면 비교적 수월하게 사회저명인사로
추앙 받고 고위공직에도 잘 진출하는 것 같다.
나도 운동권에 뛰어들어 성공하는 길을 찾겠다”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는 과거에는 눈앞의 현실, 소위 보수적 가치를 좇는 이들이
자신들의 입지를 더욱 튼튼히 하려고 사회정의를 파괴했다면,
이제는 개혁과 평등, 소위 진보를 외치는 이들이
‘가난’에 대한 사회적 책임만을 강조하여 기득권층 때문에
가난하다는 대립구도를 조장하고 자신들의 역할을 만들어
입지를 세우는 것 아니냐며 걱정했다.
몇 년 전, 비행기 안에서 만났던 어느 외국인 교수의 말이 떠올랐다.
‘가난’을 선진국에서는 그 개인의 책임으로,
후진국에서는 사회제도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후진국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이용하는 정치세력이 크게
부상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덧붙였다.
대학시절 사회과학 서적을 보면 정권에 유착된 사람들이
끼리끼리 부와 권력을 주고받고 세습하는 과정이 도표까지
동원되어 그려져 있었다.
가난한 이들은 대를 이어 가난을 세습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었고 이런 고리를 끊으려면
정권을 바꾸어 부와 권력을 순환시켜야 한다고 결론짓고 있었다.
나는 그런 글을 보면 신이 났다.
늘 세상이 바꿔져야 사람답게 살 수 있다며 한숨 쉬던
어릴 적 아버지와 마을 어른들의 소망이 정권이 바뀜으로써
가능하다는 주장은 나에게 큰 희망을 주었다.
그런데 성장하면서 나는 이런 이론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었다.
이런 이론대로라면 고려시대에도 조선시대에도
또 최근에도 개혁을 하겠다는 정권이 수없이 들어섰으니
빈부격차도, 사회적 갈등도 줄어들어야 했다.
그러나 정권교체는 개혁을 내건 몇몇 소수에게 힘을 주었을 뿐
일상을 사는 사람들의 삶에는 변화를 가져다 주지 못했다.
가장 진보적이라는 노무현 정권에서도 실업자는 여전히 늘고 있고
사회, 경제적 약자의 지위를 벗어나지 못해 자살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많아졌다는 보도가 줄을 잇는다.
노동자와 서민을 위한다는 정권에서 노동자와 서민이
“요즘 정말 살기 힘들다.”고 호소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요즈음 바뀌지 않아서 모든 것이 잘못되고 있다는
“바꿔! 바꿔!” 사상이 천지를 진동하고 있다.
친일세력이, 군부독재의 잔재가, 기득권을 지키려는 세력이
남아 있어서 이 땅에 정의가 없고 빈부격차가 심하다는 것이다.
“누구 때문에” 무엇이 안 된다는 ‘남 탓’이 넘쳐나고 있다.
어릴 적부터 수없이 들어왔던 이런 케케묵은 이야기들이
오늘 진보의 이름으로 다시 우리 앞에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말로는 개혁하겠다면서도 정작 개혁의 방향을 제시하는
일에는 등한히 한 채 거대 야당 때문에 개혁이 안 된다며
야당을 탓했던 사람들이 여대야소가 된 이제는
다시 누구를 탓하며 대립구도를 만들어 자신들의
입지를 펴나갈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사회제도가 바뀌지 않으면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는 주장은 사회적 약자를 존중하는 사상 같지만,
실제로는 가난을 사회제도 탓으로 돌리는 의타심,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겠다는
자포자기 심리를 키워준다.
과거 나치나 스탈린도 이런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
스스로 노동자와 농민의 대변자로 나섰다.
그들은 유태인과 유산계층 때문에 노동자와 농민이
못산다는 주장으로 유태인과 유산계층을 타도해야 한다며
자신들의 역할을 만들어 내고 사회적 약자들의 지지를
이끌어 냈으나 결국 자신들의 힘만 키우다가 자신들은
물론 모두를 더 처참한 생활로 이끌고 말았다.
이런 지난 세기의 보수적 수법이 21세기 오늘 대한민국에서
진보의 이름으로 꽃을 피워가고 있으니…
그들은 가난한 자를 약자로,
부유한 자를 강자로 편을 가르고 대립하게 한다.
그러나 자신의 양심과 정의를 믿고 살아가는 사람이
가난하다고 하여 부유한 사람보다 약자인가?
한 선배가 어느 지역 노동단체 임원 아버지의 장례식에 갔더니
국회의원, 기업회장들의 조화가 마을 어귀까지 즐비하게
늘어서 있더라며 노조간부의 힘이 그렇게 대단한지
몰랐다고 혀를 내둘렀다.
기득권층의 힘을 빼앗아 지금보다 더 많이 가져야만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서 벗어나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이
진보적인 것이라면,
이런 사상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자신도 더 많은 것을
가져야 행복하다는 물질적 가치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소위 개혁세력이라는 분들이 청와대를 차지하고서도
돈을 추구하다 감옥에 가는 것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자신들이 힘을 키우는 것은 정의이고
남이 힘을 키우는 것은 부정이라는 불평등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평등과 인권을 외치며 개혁과 진보를 자처한다.
그리고 힘이 없어 개혁을 못하니 힘을 모아 달라며
힘없는 사회적 약자에게 하소연 한다.
그렇게 얻은 힘으로 그들이 할 개혁은 무엇일까?
진정한 진보는 변화와 평등에 무게 중심을 둔다.
그러나 오늘 우리사회의 진보는 실질적 평등보다는 모두가
기계적으로 평등해야 한다는 형식적 평등에 집착한다.
‘권력과 힘을 빼앗아와야만 행복하게 된다’며
행복의 기준을 보수적 가치에 둔다.
의견이 다른 사람의 인권은 존중하지 않고 가혹하게 비난하면서도
자신들의 인권은 무한정 존중되기를 바란다.
이런 태도는 오늘 우리 사회의 진보가 위장된 진보요
무늬만 진보라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남을 비난하거나 편을 가르는 편협한 주장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태도는 결코 진정한 진보가 아니다.
진정한 진보는 남을 자신처럼 존중하고 배려하는
평등한 생각으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변화시킴으로써
사회를 발전시켜 나가려는 창의적인 생활태도일 것이다.
며칠 전 어느 마을에 갔다. 마을의 몇 가족이 모여 음악도 듣고,
글도 읽으며 저녁 내내 이야기 꽃을 피웠다.
아무리 직장 일이 바빠도 동네 모임이 있는
토요일은 마음이 설렌다는 이도 있고,
이 모임이 있고부터 즐겨 보아왔던 텔레비전도
뜸하게 본다는 이도 있었다.
동네 목수를 자처하고 나선 이가 집집마다 식탁과
의자도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웃음소리가 가득했고 아이들의 표정은 밝고 싱싱했다.
유치원생부터 대학졸업생까지 10여명이 넘는 아이들
모두가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었다.
아이들이 조금만 커도 부모를 따라다니지 않는다는 말이
얼마나 무성의한 얘기인지 여실히 증명해 주고 있었다.
이런 정겨운 모임이 우리 주위에 많이 있다면 나는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겠다는 새로운 희망이 생겼다.
어릴 적 내 아버지와 마을 사람들이 누구 때문에 못산다며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삶 자체에 충실했더라면 그분들이 얼마나 행복하고
가치 있는 삶을 살았을까?
또 그런 분위기에서 자랐을 나의 어린 시절은….
윤 학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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