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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당 맞아?"…시험대 오른 한나라당
이슈 못 만들고…당론도 없고…전당대회도 주목 못받은 '절간' 분위기

[조선일보]
요즘 제1야당인 한나라당의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하라면 고요하다는 표현이 가장 적절할 것 같다.
우선 새로 이사한 서울 염창동 당사는 찾는 사람이 거의 없어 절간처럼 고요하기만 하다. 발표할 것이 있는 의원들은 국회 기자실을 이용하지 당사를 찾는 경우는 거의 없다. 출입기자들도 거의 국회에 상주하다시피하고 있다. “평수를 줄이더라도 다시 여의도로 이사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점차 세를 얻어가고 있다.
그러나 당사가 조용한 것은 부차적인 문제일 수 있다. 진짜 문제는 제1야당인 한나라당이 자체적으로 이슈를 만들어내지 못해 제 목소리를 잃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두 달 동안 한나라당은 ‘국회 예결특위 상임위화’ 말고는 이렇다할 만한 정국 이슈를 생산하지 못했다. 6월 초 국회가 열린 이후 한나라당은 예결위 상임위화가 최대 개혁 과제라며 이를 관철시키는 데 당력을 집중했다. 그러나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는 열린우리당 원내대표단 약속을 믿고 기다리기만 하다가 이마저도 관철시키지 못했다.
이 두 달 동안 당밖에서는 엄청난 국가적 현안들이 많았다. 행정수도 이전 문제, 경제 침체, 김선일씨 피살 사건, 북핵 문제, 의문사위의 간첩 민주화 기여 인정 등 이슈가 톱기사를 장식했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이런 문제에 대해 수동적으로 반응을 내놓은 것 외에 야당 목소리를 내놓지 못했다. 김문수 의원의 표현을 빌리자면 “상임위에서 한마디하고, 신문에 기사가 나면 한마디 하는 식이라 당이 국가적 이슈에 천착해 큰 목소리를 낸다는 느낌이 없었다”.
수도 이전에 대해서는 찬성인지 반대인지 당론도 없이 “타당성, 실현 가능성 등을 제대로 검증해보자”고만 말하고 있다. 이슈면 이슈, 정책이면 정책, 뭐하나 똑바로 하는 게 없다는 것이다. 최근 큰 실수는 없었지만, 한나라당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열린우리당은 자기 색깔 분명히 표현
이러는 사이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옳든 그르든 연일 의원총회를 열어 자기 색깔을 분명히 내가고 있다. 당 지도부는 친일진상규명특별법 개정, 이른바 ‘오세훈 선거법’ 재개정, 연기금의 주식투자 허용, 고위공직자 비리조사처 설치 등을 추진했다. 의원들은 의원들대로 의문사위 권한 강화, 사형 폐지 방침, 양심적 병역 거부에 대한 대체복무 입법 추진 등 다양한 목소리를 내서 정치면을 장식하고 있다. 좀 어수선해 보이는 면이 있지만 다양한 목소리를 냈고, 이를 한 곳으로 수렴해가려는 노력을 보여 자연스럽게 당 색깔을 나타내는 측면이 있다는 것이 당 안팎의 견해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지도부도 의원들도 제 목소리를 잃고 긴 ‘침묵기’를 가졌다. 이렇다보니 출입기자들은 요즘 청와대나 열린우리당이 발표한 사안에 대해 한나라당의 ‘반응’을 받느라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당 지도부는 토론 활성화를 위해 매주 월요일 의원총회, 수요일에는 정책 의총을 열겠다고 했지만, 이 약속은 이런저런 이유로 잘 지켜지지 않고 있다. 반면 열린우리당은 일주일에 두세 차례 의총을 열어 당내외 현안들을 논의하고 있다.
한나라당은 4·15 총선 직후 부정적인 이미지를 씻고 새 출발을 하자는 취지에서 당명을 개정하려 했다. 하지만 영남권을 중심으로 상당수 의원들이 반대하자 추진을 포기했다. 이에 대해 심재철 의원은 개인 성명을 내 “당명 개정은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라며 “6·5 재보선에서 이겼다고 변화를 거부하면 필패의 길만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 의원은 “당명 개정을 안하더라도 치열한 토론을 통해 이유를 분명히 해야하는데 반대가 좀 있다고 어물쩍 넘어가는 식이 문제”라고 말했다. 정의화 의원도 개인 성명을 내고 “당이 제2의 침체기로 빠져드는 것이 아닌지 우려를 금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한 당직자는 “당내에는 문제가 없는 것이 가장 문제”라며 “특히 박근혜 전 대표가 전당대회 출마를 위해 사퇴하자 당이 ‘의식불명 상태’ 같다는 것이 많은 당직자들의 푸념”이라고 말했다.
“문제가 없는 것이 가장 큰 문제”
이처럼 한나라당이 고요한 것은 6·5 재보선에서 승리하고 여론조사에서 1위로 나타나자 현실에 안주하려는 경향 때문이라는 것이 당내 의원들의 공통적인 지적이다. 그러는 사이 한나라당은 최근 여론조사에서 오차범위 이내이긴 하지만 열린우리당에 다시 1위를 내주었다.
당이 이렇게 돌아가자 심지어 당 최고지도부인 김덕룡 원내대표까지 기자들과 만나 “당이 자기혁신을 해야 하는데 너무 안이하게 가고 있다. 달이 아무리 밝아도 달빛으로 결실을 맺을 순 없다. 구름 속에 빛이 있어도 햇빛이 있어야지 ‘반사이익’ 갖고는 승리할 수 없다”고 말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나라당이 최근 마지막으로 기대를 건 것은 전당대회였다. 대표를 선출하는 전당대회를 통해 당에 활력을 불어넣고 국민들의 관심도 끌어보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전당대회는 거의 국민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서울 합동연설회도 포기해야 할 정도로 흥행에 참패했다. 박근혜 이강두 이규택 원희룡 정의화 김영선 곽영훈 후보가 출마했지만, 박근혜 대표의 재당선이 확실한 상황이었고 경선 과정에서 누구도 박근혜 대표 노선에 정면 반기를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후보들은 박 대표와 친밀성 등을 과시하며 표를 얻으려 하는 전략을 보였다. 원희룡 후보는 경선을 사흘 앞두고 열린 7월 16일 KBS 합동토론회에서 “총선 때 박 대표와 함께 국민이 OK할 때까지 한나라당을 바꾸겠다고 한 약속을 지켜야 한다”며 “저와 박 대표의 개혁노선이 성공할 수 있도록 지켜달라”고 지지를 호소했다. 원 후보는 또 TV토론에서 박 후보에게 인기관리 비결을 묻거나 박 대표의 미니홈피에 ‘도토리’ 등 ‘사이버 선물’을 보낸 사실을 거론하기도 했다. 이규택 후보도 “박 후보의 부드러운 리더십과 저의 몸을 사리지 않는 추진력을 합쳐 야당다운 야당으로서 국민의 고통을 덜어주겠다”고 말했다.
이강두 후보는 박근혜 후보에게 질문하면서 “열린우리당이 친일진상규명법을 개정해 요즘 뜨고 있는 박 대표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려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다”며 반박 기회를 주었다.
이 같은 상황은 이번 전당대회 표결 방식이 한 대의원이 후보 2명에게 표를 주는 1인2표제이기 때문에 한 표는 박 후보에게 주더라도 다른 한 표는 자기를 달라는 차원에서 나오는 것이다.
최근 한나라당에서 자체 목소리가 전혀 나오지 않은 것은 아니다. 최근 두 가지 목소리가 관심을 끌었는데, 하나는 이재오 의원이 박근혜 대표를 ‘독재자의 딸’이라고 비난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의원들이 지도부 무기력을 질타한 것이다.
이 의원은 최근 한 스포츠신문과 인터뷰에서 “어느날 갑자기 탤런트처럼 등장한 독재자의 딸이 당 대표가 되면 개인은 영광이겠지만 한나라당은 망한다”고 말했다.
이 의원은 “최병렬 전 대표가 5·6공(共) 상징이라고 해서 물러났는데 한국 정치사에서 가장 부정적인 유신 독재자의 딸이 당 대표를 차지하고 있었으니 내가 얼마나 착잡했겠느냐”며 “박근혜 대표가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로 부상하고 있지만 2007년에 출마하면 100전 200패”라고 말했다. 이 의원은 “박 전 대표는 두 아들 병역문제 때문에 고배를 마신 이회창 후보보다 독재자의 딸이라는 더 큰 원죄를 갖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보수 성향 의원들은 ‘당 정체성’ 우려
7월 15일 의원총회에서는 무기력한 야당에 대한 비판과 김덕룡 원내대표 등 원내대표단 퇴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쏟아졌다.
보수 성향의 의원들은 그들대로 “당 정체성이 흔들린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상배 안택수 이방호 의원 등 보수 성향 의원 21명은 최근 ‘자유포럼’을 출범시켰다. 이들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 등 국가 정체성을 바로 지키고 ‘중도보수’라는 당 정체성을 지키는 데 목소리를 낼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모임에는 박종근 이재창 최병국 박성범 김재원 김영덕 김정훈 박순자 의원 등도 참여했다.
이 모임은 16대 국회 때 김용갑 의원 등을 중심으로 활동한 ‘안보를 걱정하는 의원 모임’과 성격이 비슷하다. 자유포럼은 반박(反朴) 성향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박 전 대표에게 대여(對與) 강경투쟁을 주문하고 있다.
한나라당에는 자유포럼 외에 이재오 홍준표 김문수 의원 등 3선 중심의 국가발전연구회, 개혁 성향의 소장파 모임인 새정치수요모임, 강재섭 맹형규 의원 중심의 ‘국민생각’, 박진 임태희 의원 중심의 푸른정책연구모임 등이 활동하고 있다. 이 중 새정치수요모임만 박 전 대표에게 우호적일뿐 다른 모임들은 비판적이거나 중립적인 입장이다.
이밖에도 한나라당 당론은 이라크 파병 찬성인데, 이재오 고진화 의원 등은 파병 재검토 결의안에 서명했고, 이계진 의원은 박창달 의원 체포동의안 부결로 역풍을 맞은 여당이 내놓은 의원 표결실명제법안을 대표발의를 하는 등 어수선한 양상을 띠고 있다.
2기 체제를 맞은 박근혜 신임 대표는 자신이 강조해온 ‘상생 정치’를 이유로, 전당대회 직 후부터 당내 여러 세력의 거센 도전을 받을 것 같다.

김민철 조선일보 정치부 기자([email protect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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