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는 최근 역대 대통령의 통치자료 1302건을 발굴해 공개했다. 이 통치사료 중 관심을 끄는 것은 陸英修(육영수) 여사가 국내 知人(지인)이나 외국의 頂上(정상) 부인들과 주고 받은 편지다. 陸여사는 金南祚(김남조) 詩人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도 오뇌와 번민을 허다하게 간직한 인간이고, 연약한 여인이라고 적고 있다. 陸여사는 외국 頂上 부인들과 편지를 통해 음식에 관한 얘기를 자주 주고 받았고, 실제 음식을 선물로 보내고 받기도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번에 공개된 통치사료 중에는 朴槿惠(박근혜)씨에게 펜팔을 신청한 라오스 청년의 편지도 포함되어 있다. 자신을 라오스 출신 시앙 치아라고 밝힌 이 청년은 朴槿惠씨와 펜팔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陸英修 여사의 지시에 따라 청와대 의전실에서 『근혜씨가 바빠서 펜팔을 할 수 없다』며 거절하는 답신도 함께 발견됐다.
朴正熙 대통령은 오랫동안 앓아 온 코의 질병 치료를 위해 일본인 의사에게 수술을 받았고, 陸英修 여사의 죽음에 대해 비통해 했던 마음도 朴대통령의 편지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陸英修 여사와 金南祚 시인의 인연
◆陸英修 여사가 보낸 편지
▲1967년 3월27일 金南祚 시인에게 보낸 편지 내용 全文.
<김남조 여사께.
밤은 꽤 깊었습니다. 이 사심 없는 밤의 정기를 타고 저는 첩첩이 싸여 있던 마음의 창문을 활짝 열어서 여사님과 더불어 따뜻한 대화의 보금자리를 펴 보고 싶어졌습니다. 무엇이든 후련하도록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졌습니다.
시를 통하여 여러 사람의 가슴에 깊은 감명을 불러일으켜 오시던 김 여사님을 처음 뵙기는 수 년 전, 설악산에 단풍이 아름답게 물든 가을, 강원도 어느 자그마한 마을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때 김 여사께서 인솔하고 가시던 학생들과 함께 찍은 기념 사진은 저의 앨범 한 면에 소중스레 간직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으로서의 김남조씨를 마음 가까이 느낄 수 있었던 것 또한 저 하늘에 달과 별들의 밀어가 담겨진 밤을 그 몇백 번인가 거슬러 올라간 어느 달 밝은 밤에 텔레비전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때 김 여사께서 유광렬씨와 나눈 대화 중 가장 인상 깊었던 단편이 있어 잊혀지지 않는군요. 즉 달을 과학적인 탐색의 대상으로 삼지말고 신비로움을 그대로 간직한 詩情(시정)의 대상으로 내버려 두었으면 좋겠다고 하시던 말씀… 어쩐지 김 여사님의 이 말씀으로 지난 번에 주신 글에 대하여 불명하나마 답을 드릴 수 있을 것같이 생각됩니다.
김 여사님,
저는 대통령의 아내이기에 앞서 오뇌와 번민을 허다하게 간직한 인간이며 또 그러한 인간이기에 극히 다정다감한 연약한 여인입니다. 그러기에 달을 시정의 대상으로 보고 싶은 여인인 점에서 김 여사님과 저는 조금도 다른 점이 없다고 여겨집니다. 허지만 현실은 달에 대한 무자비한 탐색을 강요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달에 대하여 보배처럼 귀중히 간직하고 있는 신비로움에 찬 동경의 정이 애처롭게 짓밟히고 있습니다.
김 여사님은 대통령과 저에게 종교를 갖도록 그리도 간곡하게 권고하셨습니다. 이는 마치 어린 시절에 다정한 벗이 양지 바른 어느 아늑한 잔디밭으로 내 손목을 이끌어 주던 것같이 구김새 없는 마음에서라고 생각하고 이 따뜻한 권고를 감사히 여기며 경건하게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아니 어쩌면 의식에 찬 종교의 기념을 떠난다면 이미 내 마음의 신앙의 뿌리는 내려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잠 못 이루는 늦은 밤에 품어보는 깊은 회의, 오열을 불러일으키는 회한과 고민, 허전하기만 한 위치에서 뿌리칠 수 없도록 절박하게 스며오는 고적감, 이들은 모두 나에게 스스로의 무력하기 그지 없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였고 그때마다 이런 것들이 계시하는 무엇인가에 대한 의구감을 자아내게 하였습니다. 어떠한 절대가 있어 항시 그 앞에 무릎 꿇고 고개 숙여야 할 것 같은 느낌을 불러일으켜 왔습니다.
이런 것이 엄밀한 의미에서 신앙이 아니라고 하셔도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저에게는 소지(素志·평소 품고 있던 뜻-편집자 注)로써 충분하다고 느껴집니다. 외형적인 종교를 갖는 전시적 효과라면 이를 피해야 하겠습니다. 신앙을 가졌으되 종교의 형식을 갖추지 않아 불합리하다는 이유만으로서 종교를 갖는다면 이는 모독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극히 평범한 인간이 평범한 이상을 가장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가 아쉽습니다. 신앙을 심어 주며 또 종교를 심어 받을 수 있는 처지가 되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김 여사님,
현명하신 이해와 관대하신 아낌으로써 위의 말을 답으로써 족하다고 다짐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김 여사님, 대통령이나 저에게는 어느 누구에게도 못지 않다고 자부할 수 있는 소신이 있음을 덧붙여 드리고 싶습니다.
이 소신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들을 지탱하여 왔고 이 소신으로 하여 우리들의 존재에 스스로 의의를 부여하여 왔습니다. 물론 이것은 신앙과는 전혀 차원이 다릅니다. 이른바 종교의 절대성이 결여되어 김 여사께서 말씀하신 인간적 역사성에 있어 가치가 개재할 수 없는 것이라 하여도 하는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없는 전통을 창조하여야 하는 엄숙한 과제를 지닌 이 나라 국민의 일원으로서 앞으로 살아남는 역사의 큰 별을 만들어 내도록 노력하는 과정에 있음을 천만다행으로 여깁니다. 그런 틈에서 이 나라는 불태울 수 있는 젊음을 절실히 요구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개인의 연조는 물론, 일국의 빛나는 전통은 무엇인가 창조하기 위해서 피나는 노력을 다하는 오랜 시련의 과정에서 이룩될 수 있고 또 이룩되어야만 정당하다고 확신합니다.
김 여사님,
김 여사님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나 밤은 소리없이 깊어만 갑니다.
여사님의 말씀과 같이 오랜 세월이 흘러 많이 깨우치고 모든 번거로움을 아낌없이 털어 없애고 홀가분하게 된 연후의 그 어느 날, 서로 만나서 허심탄회한 정을 나누게 되기를 바랍니다. 반드시 밤만이 아닌 대화의 광장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햇살 밝은 자리에서도 가지십시다. 많은 아쉬움을 간직한 채 이제는 오늘과 내일의 문을 닫고 쉬어야 할 때가 왔나 봅니다. 그럼 이 밤도 편히 쉬십시오. 그리고 천주님의 은총이 항상 김 여사님과 같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金南祚 시인, 『통치자 아내로서는 부족한 점이 있었다』
金南祚 시인은 2002년 1월12일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陸英修 여사와 전화통화를 하거나 만난 적은 몇 차례 있었지만 편지를 교환하기는 이 경우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말했다.
金南祚씨는 陸英修 여사에 대해 『한국 어머니像의 대표적 여인 중 한 사람이며 겸손하고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金씨는 陸英修 여사로부터 자식들에게 종이를 절약하기 위해 이면지를 이용하고 볼펜도 심만 바꾸어 사용하도록 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전했다.
金南祚씨는 『陸英修 여사는 문학뿐 아니라 여러 부문의 학문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고 했다. 陸여사가 자신에게 문학강의를 해 달라는 부탁을 해와 朴木月(박목월) 시인을 陸여사에게 소개했고 이후 陸여사는 朴木月 시인으로부터 문학을 비롯한 여러 부문에 대해 많은 가르침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金씨는 陸英修 여사의 요청에 의해 朴槿惠씨가 천주교 영세를 받을 때 代母(대모)를 맡기도 했다고 한다. 이번에 공개된 朴槿惠씨 관련 자료에는 槿惠씨가 영세를 받은 시기는 1965년 6월이며 세례명은 「유리아나」라고 적혀 있다.
金南祚씨는 『陸英修 여사는 한국의 대표적 어머니像인 것만은 틀림없지만 한 나라를 이끌어가는 통치자의 아내로서는 다소 부족한 점이 있었던 것 같다』고 평가했다. 통치자의 아내로서 갖추어야 할 根本(근본)에 관한 自覺(자각)이나 민주주의 등 자유주의 국가의 綱領(강령)에 대해서는 철학적 깊이를 가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陸여사가, 1969년 4월22일 당시 朴志晩(박지만)씨에게 영어회화를 가르치던 성심수녀원(서울 원효로 4가 1)의 매리 캐더린 라이리 수녀에게 보낸 편지 내용 요약.
<친애하는 라이리 수녀님,
그곳 성심동산에도 꽃과 돋아나는 나뭇잎들로 아름답겠지요. 그동안 영어의 기초도 없는 지만에게 회화를 지도하시기에 때때로 피곤하셨으리라 믿습니다.
머지않아 이곳에 오시게 될 국빈을 위해서 지만에게 영어회화를 다소 익혀 두어야겠다고 생각되어 그동안 라이리 수녀님께 부담을 드려왔었으나, 기실 지만에게는 밤에는 않던 공부를 하게 되니 몸에 무리가 가는 듯 감기가 오래 계속되고 하여 중단할 수밖에 없었음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지만이가 라이리 수녀님과 자리를 같이하는 시간은 비록 짧고 또한 의사소통이 힘들어 어렵기도 한 모양이나 자상하신 라이리 수녀님의 보살핌에 그 경건하고 새로운 환경에 접하여 배우고 느낀 것이 많은 것 같습니다.
욕심 같아선 인자하신 라이리 수녀님 밑에서 지만이가 좀더 착실하게 영어도 배우고 여러모로 유익한 시간을 갖게 하고 싶었으나 그렇게 되지 못하는 일을 서운하게 생각합니다.
그동안 지만이를 위해서 애써 주신 노고에 지만이와 함께 감사드리며 항상 라이리 수녀님 위에 천주님의 은총이 같이 하기를 바랍니다>
▲1964년 대만 장개석 총통 부인에게 보낸 편지 내용 요약(인삼을 꿀에 담근 것을 보냈는데, 이 인삼꿀의 담그는 방법과 보관 및 복용방법 등에 대해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친애하는 장 총통 부인.
본인의 성의의 표시로 옛날부터 장수와 건강에 효력이 크다는 한국 인삼을 꿀에 담근 것을 보내드리게 됨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본인이 직접 이것을 만들었습니다. 처음에 나무로 만든 그릇에 인삼을 씻고 나무로 된 칼로 다듬은 다음 꿀의 산지로 유명한 강원도 깊은 계곡에서 채집된 꿀에 담근 것입니다.
이 인삼에 쇠가 닿으면 약효가 감소된다 하오니 본인이 이 인삼과 함께 보내드리는 나무 스푼을 사용함이 좋을 줄 압니다. 또한 인삼에 쇠그릇이 닿지 않도록 하심이 좋을 것입니다.
이것을 복용하실 때는 한 스푼에서 한 스푼 반 비율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곳 대통령께서 하루의 집무 후에 피로를 느끼시면 저는 이러한 방법으로 인삼을 만들어 드립니다. 복용하신 후 피로를 회복하신 것 같습니다.
이 인삼이 국가의 중책을 맡아 계시는 장 총통의 피로를 회복시키는 데 효력이 있을 줄 사료합니다>
前 令夫人에게 보내는 편지
▲1969년 8월 당시 오스트리아에 체류중이던 故 李承晩(이승만)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李박사 작고 후 母國에 돌아가 살고 있었다)에게 건강을 염려하며 보낸 편지 내용 全文.
<프란체스카 여사님.
요즈음 이곳 서울은 지루한 장마 끝에 개인 날이 시작되어 작열하는 태양 아래 온갖 초목들이 싱싱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 지상을 통하여 여사님이 병상에서 고생하고 계시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언젠가는 돌아오시게 되려니 생각하던 중 여사께서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듣고 놀랐습니다.
지병이신 담낭염에 십이지장병과 고혈압까지 겹친 병고를 겪고 계시다니 2년 전에 이곳에서 뵈었던 건강하시던 모습이 나의 앞에 엇갈려 무어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곳 대통령께서도 별도로 위로의 말씀이 계셨습니다.
다시 이곳 한국으로 돌아오시겠다는 말씀을 기억하고 있는 많은 국민들은 여사님의 와병 소식을 전해 듣고 모두 걱정하고 있습니다.
부디 하루 속히 건강을 회복하시어 여사님의 귀국을 기다리는 많은 분들과 함께 이곳 서울에서 다시 뵙게 되는 날이 있게 되기를 본인은 대통령과 함께 간곡히 바라고 있습니다.
올해 이곳 벼농사는 비가 흡족히 내려 풍년이 기약되고 있습니다. 특히 연 2년 동안이나 가뭄에 애태웠던 호남지방의 농부들은 무척 기뻐하고 있지요.
그리고 이곳 서울의 모습은 그동안 안팎으로 많이 달라졌지요. 특히 상점이나 시장엔 여러 가지 일용 필수품들이 많이 나돌고 있어 외국인들도 이곳에서 생활하기가 퍽 좋아졌다고 말하는 것을 종종 듣게 됩니다.
머지 않은 후일 명랑한 모습으로 돌아오시는 여사님을 다시 뵙게 되는 날이 있게 되기를 기다리며, 여사님을 살펴주고 계신 의사 선생님과 병간호를 맡고 계신 여러분에게 각별한 나의 안부를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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