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임시국회 3당 대표연설이 끝났다. 사실 임시국회 대표연설은 별로 국민들 관심사가 아니었다. 낡은 정치에 대한 불신이 국회 자체를 불신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임시국회 대표연설은 예외적으로 국민들의 관심을 조금은 받았다.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정동영 열린우리당 당의장의 대표연설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정동영 의장이 엄청난 인물이어서가 아니라, 도대체 정동영이 누구길래 그가 열린우리당 당의장에 취임하자마자 열린우리당의 지지율이 강세를 보이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 있기 때문이다. 정동영 의장을 예전부터 잘 알고 있는 사람들도, 이제 열린우리당의 뉴리더로서 데뷔연설을 얼마나 잘 할 수 있을 것인지 궁금했을 것이다. 이번 임시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은 이런 면에서 처음부터 정동영 데뷔무대이자, 정동영을 위한 자리였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한나라당의 최병렬 대표와 민주당의 조순형 대표는 이런 면에서 처음부터 상당히 불리한 입장에서 대표연설에 임한 셈이다. 기본적인 조건 자체가 최병렬-조순형은 정동영 데뷔의 들러리 역할로 규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순서도 최병렬-조순형-정동영 순서로 짜여져 있었기 때문에, 별로 차별화되지 않는 최병렬-조순형 보다는 정동영 당의장이 더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불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나름대로 다른 정당과 차별화를 꾀할 필요가 있다. 선거에서는 모두가 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최병렬대표와 조순형대표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했다.
최병렬-조순형 듀엣의 연설을 들어본 사람들이면, 과연 이 두 정당 즉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왜 다른 당으로 나와야 하는지 이유를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두사람이 가위바위보를 하든지 동전던지기를 하든지 간에 결정을 지어 한명만 나와도 될 일을, 두사람이 각기 한번씩 나와서 짜증만 배가시키느냐는 불만이 나왔을 법하다는 얘기다. 최병렬 대표와 조순형 대표는 노무현 대통령 까대기에 열을 올렸다. 최병렬 대표는 한나라당으로는 치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 개헌론을 들고 나와 개망신을 당했고, 조순형 대표는 이제 그 용도가 다한지 10년이 넘은 탄핵론을 끌고 나와 짜증만 불러일으켰다. 이들의 공통점은 네거티브다. 이들의 공통점은 지역당이다. 네거티브와 지역당이란 이미지를 한껏 과시했다.
사실 네거티브 전략은 낡은 패러다임의 정치가 낳은 산물이다. 왜 국회가 네거티브가 될 수밖에 없었는가. 국회의 공격대상인 정부가 독재권력이었기 때문이다. 독재권력이 존재하는 한 그 권력을 부정하는 것(네거티브)이 선(善)이었다. 누가 무슨 말로 포장한들 독재권력이 명백한 악(惡)이란 점은 국민들의 공감대였기 때문이다. 비록 독재권력의 폭압 때문에 말로는 표현하지 못했지만, 국회의원들이 면책특권을 활용해 국회 연설이나 발언 등을 통해 독재권력을 통쾌하게 까부심으로써 국민들의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측면이 있었다. 그때는 네거티브가 선이었고, 네거티브의 대상이 악이었다. 이것이 과거 낡은 패러다임의 정치를 규정짓는 중요한 선험적 환경이었다.
지금은 패러다임 시프트의 시기다. 한나라당이 지난 1년간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를 신나게 괴롭혀준 덕분에 이제 정권이 권력이란 개념은 사라져버렸다. 어느 여론조사를 해도 이 나라 최고권력은 의회를 지배하고 있는 한나라당이며, 거기에 빌붙어있는 민주당이란 사실은 입증됐다. 대통령과 청와대는 의회독재권력보다 못한 존재가 됐으며, 심지어는 조선일보로 대표되는 언론권력만도 못한 신세로 전락했다. 한나라당이 그렇게 만들었던 것이다. 지금은 정권이 악이 아니라 의회독재권력이 악이다. 지금도 네거티브는 효과가 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에 대한 네거티브전술은 확실히 효과가 있다. 그들이 권력이기 때문이다. 거꾸로 약자인 열린우리당과 정권에 대한 네거티브 공세는 강자의 오만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지금 정국의 바닥에 깔려 있는 핵심적 환경이다.
한나라당이 홍준표같은 선수를 동원해 아무리 네거티브 전략으로 나와도, 민경찬 펀드사건과 같은 호재를 만나 아무리 공격하고 씹고 그래도 지지율에 별로 도움이 안되는 근본이유를 그들은 여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아니, 한나라당에서는 거의 영향력이 없는 젊은 몇몇 의원들만 알고 있다. 정작 이런 문제의식을 가져야 할 최병렬 대표나 나이많은 영감그룹에서는 이해할 준비조차 돼 있지를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지난 1년간 그들 스스로 만들었다는 사실도 어쩌면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는지 모른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한나라당이 열린우리당과 참여정부에 보내는 네거티브 전술은 전혀 먹혀들고 있지를 않는 것이고,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닭짓, 뻘짓에 대한 네거티브 공격은 훌륭하게 먹혀들고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최병렬-조순형 듀엣이 이번 대표연설에서 보여준 두번째 닭짓은 서로간 지역당이며, 낡은 틀의 정당이며, 서로 합치는 것이 더 낫다는 점을 만천하에 공표했다는 점이다. 사실 이 닭짓에는 조순형 대표의 잘못이 더 크다. 최병렬대표의 뒤를 이어 연설하면서 최병렬 대표가 읽어도 전혀 이상하다고 생각지 않을 내용들로만 가득 채워놓았기 때문에 국민들은 이 두당이 과연 어떤 차별성을 갖는 정당인지 분간을 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이게 왜 치명적이냐 하면, 지금 지지율 선두를 좇고 있는 두 당의 입장에서는 조금이라도 앞서는 쪽이 유리하다. 즉 차별성이 없어졌을 때 이득을 보는 쪽은 한나라당이고, 손해를 입는 쪽은 민주당이란 얘기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조순형 대표는 이적행위를 한 셈이다. 물론 두 당, 즉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합당한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두 당의 입장에서 보면 손익은 이러하고, 민주당 입장에서만 보면 더욱 치명적으로 작용한다. 민주당이 민주당일 수 있는 것은 그래도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이 민주당을 배신했다는 정서가 부분적으로나마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을 배신자라고 몰아부치면서, 광주학살의 주범인 전두환 조폭이 만든 민정당에서 출발해, 바로 그 민정당에서 온갖 요직을 거친 사람(최병렬)이 대표고, 그 떨거지가 주류인 정당 한나라당과 공조의 수준을 넘어 합당의 수준까지 간다는 것은 뭘로 얘기해도 설명할 길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조순형 영감은 노무현 대통령을 신나게 씹어 자시 자신의 스트레스를 해소했을는지는 모르나, 민주당의 지지기반들이 본다면 정말 통곡을 해도 시원찮을 얘기들만 잔뜩 늘어놓았다는 얘기다.
이미 민주당으로서는 포지셔닝 시프트를 할 찬스를 놓치긴 했지만, 진작부터 민주당은 노무현 대통령을 직공하는 전술을 회피했어야만 했다. 노무현 대통령을 직공하는 한 한나라당과 차별성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을 공격하지 않으면 열린우리당과 차별성이 엷어지는 단점이 있는데, 이걸 극복하기 위해서 실은 배신자론을 들먹였어야 했다. 즉 열린우리당은 배신자당이다, 그러나 배신자당을 응징해 노무현 대통령이 우리를 버렸지만 우리는 노무현 대통령을 성공한 대통령으로 만들겠다는 전략을 구사했어야 했다. 이게 인간적으로도 더 심금을 울린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되돌리려면 지도부를 바꿔야 하는데, 지금은 이미 전선이 형성된 총선국면이기 때문이다.
반면 열린우리당의 정동영 의장은 대단히 정확한 전술을 구사했다. 국민들에게는 포지티브를, 야당에게는 네거티브를 적용했다. 경제살리기라든지, 미래에 대한 비전 제시라든지 하는 포지티브는 실은 국민들을 향한 호소다. 지금까지 악의 축이 돼버린 한나라당의 네거티브에 국민들은 신물을 내고 있는 상태기 때문에, 그가 누구든 희망을 주는 발언에는 호감을 느낀다. 아마도 제도권언론은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제도권 언론의 맹점은 정치권은 정쟁의 주체란 인식이 뇌리 깊숙히 각인돼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TV중계를 통해 직접 정동영 의장의 발언을 들어본 사람이면, 최병렬-조순형 듀엣과 확실한 차별성을 느낄 것이며, 호의적으로 바라볼 것으로 판단된다.
정동영 의장도 네거티브 전술을 구사하긴 했다. 대신 철저하게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공조에 초점을 맞췄다. 이런 면에서 민주당은 실은 좀 억울한 측면이 있다. 한나라당의 노선에 괜히 한발 담궜다가 국민들에게는 그넘이 그넘이란 인식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주당이 노무현 대통령의 비리(?)와 관련된 정보가 무지무지하게 많다고 한나라당에게 살살 꼬리치면서 청문회 공조를 한 이상 어쩔 수 없이 받아야만 하는 대접의 성격이 있다. 어떻든 정동영 의장은 한나라-민주의 청문회 공조와 관련해 "떼도둑이 검사를 불러 심문하겠다는 격"이라고 몰아부친 것은 실은 네거티브적 공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건 약발이 먹히는 공격이다. 왜냐하면 한나라당은 누가 뭐래도 의회독재권력이란 인식이 국민들에게 광범위하게 퍼져있기 때문이다.
정동영 의장의 부상은 한나라당과 민주당에게는 치명적이다. 총선은 지역선거의 종합이긴 하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도 중요하다. 과거 신한민주당의 돌풍이 이런 면을 웅변해준다. 차기 대선은 먼 일이긴 하지만, 정동영의장의 부상은 최소한 열린우리당의 미래에 한가지 분명한 선택이 생겼다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와 민주당 조순형 대표가 그들 당의 미래라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차기 주자가 선거전을 뛰어다니는 것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뛰는 것과는 천지차이다. 게다가 최병렬 대표나 조순형 대표는 틈만 나면 개헌이니 탄핵이니 이런 네거티브적 얘기만 늘어놓음으로써, 정상적인 승부로는 이길 수 없으니까 사술(詐術)을 쓴다는 인식만 잔뜩 국민들에게 불어넣고 있다.
필자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을 보면, 과연 이 두 당에 달라진 패러다임의 정치토양을 공략하려는 전술전략이 존재하는 정당인지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그것이 인간의 약점이나 실수 때문인지, 아니면 이들 정당의 시스템이 안고 있는 약점 때문인지 분석해볼 필요도 있다. 러프하게 얘기한다면 둘다가 이유겠지만 아무래도 후자쪽이 더 큰 이유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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