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게, 동갑내기 친구, 내가 올해 신세가 말이 아니네.

한달 전만해도 이런 순간이 내게 닥칠 줄은 정말이지 한번도 상상도 못했지.

하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얻은 교훈도 많지. 이 교훈을 무덤에 갖고 가기 보다는 이왕이면 친한 사이인자네에게라도 알려주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네.

처음 말해줄 교훈은 군대만 단단히 틀어쥐면 지방에서 들고 일어나도 문제가 아니라는 걸세. 나 보게나. 반격에 나서니 한때 기세등등하던 반란군이 물먹은 흙담벽처럼 무너지지 않나.

탱크와 비행기로 중무장한 군대 앞에선 백성이 아무리 많이 들고 일어나서 저항해야 힘이 없는 걸세. 그러니 군대를 잘 통제하게나. 난 수도만 내놓고 다 알 카에다의 조종을 받는 폭도들의 손에 넘어갔던 상황이지만 고작 군대 몇 만 명만 가지고도 며칠 만에 다 회복했지.

자넨 군만 110만 명이 넘고 여기에 보안군과 비밀경찰 다 합쳐서 200만 명이 넘으니 나보다 무력이 수십 배나 많지. 그러니 진압 같은 것은 일도 아니지.

그리고 진압할 때 외국기자들 절대 못 들어오게 하게나. 저들이 들어와서 시민이 학살되니 뭐니 중계를 해대니 체면이 말이 아닐세. 워낙 이 분야는 나보다 훨씬 고수니 다 알아서 잘 하겠지만 말이야.

두 번째 교훈은 시위가 발생하면 그냥 애초부터 잔인하게 밀어버리라는 거야.나는 처음에 군을 동원해 밀었어야 하는데 타이밍을 놓쳤지. 자네는 나보다 훨씬 더 잔인하니 이건 참 잘하겠지만 노파심에서 말하는 것일세.

트리폴리 코앞까지 폭도들이 닥쳐와도 명색이 혁명의 지도자인데 차마 백성을 탱크로 밀어 버릴 수 없어 군 동원을 고심하다 결국 이 꼴이 났네. 이후 들고 일어났던 도시를 다시 평정할려니 저것보게, 이제 와선 참견하는 자들이 늘어나는 것을…그냥 애초에 싹부터 잘랐어야 하는데…

 서방국가들을 너무 두려워 말게나. 내가 벵가지까지 하나하나 재탈환하는 과정에 저들은 팔짱을 끼고 있었지.

지금 공습도 하고 있지만 어차피 지상군은 못 들어오니 내가 무력을 밀어붙이지 않고 개입명분만 없애주면 그건 곧 중단될 거고 내 정권도 끄떡 없을거야.

난 뒷배가 없지만 자넨 중국이란 뒷배가 있으니 미국이 감히 밀고 오지 못할걸세. 러시아도 마찬가질세. 저들이 서방의 무력개입에서 결사적으로 막아줄 걸세. 자넨 지정학적으로 얼마나 좋은가. 바로 코 앞에 수천 만명이 사는 한국이라는 결정적인 인질도 있고 말일세.

자네 땅엔 기름 같은 것도 없으니 리비아보다 훨씬 더 큰 리스크를 감내하며 침공할 매력도 없지. 그러니 서방 같은 것은 두려워하지도 말게나. 저들이 큰 피해를 입으면서까지 자네 백성들을 보호해줄 나라들은 아니니 말일세.

내가 요즘 가장 크게 후회하는 것이 무엇인줄 아나.

예전에 서방이 대량살상무기(WMD)를 포기하라고 너무 압력을 넣는 바람에 그만 두 손을 든 것일세. 핵만 있어봐. 저들이 감히 지금 내 땅에 공습을 해댈 수 있겠냐 말이지.

WMD 포기를 선언하면 서방과도 친해져서 경제도 좋아지고 원조도 많이 받을 줄 알았지. 특히 미국은 말이야. WMD를 포기하면 천국이 열릴 것처럼 구슬렸지. 아, 내가 오판했지.

그런데 지금 봐봐. 내가 포기의 대가로 받은 경제적 대가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정말 뭐 볼 것이 없지. 그리고 WMD를 포기하면 당장 친구가 될 것처럼 하던 저들이, 내가 정말 괜찮은 사람이라고 봤던 오바마가 내가 좀 곤궁에 몰렸다고 저렇게 태도를 싹 바꾸는 것을 보게나.

이해관계가 걸린 바레인 같은 데선 외세가 들어가 시위진압을 해도 가만 보고 있으면서도 나에겐 폭격을 해대는구만. 아, 아, 내게 핵무기만 있어도 이런 수모는 당하지 않는 건데.

자네도 미국과는 절대 친구가 될 수가 없네. 자네에겐 이미 내게 없던 핵무기가 있지 않는가. 그러니 어떤 유혹 앞에서도 절대로 핵무기는 포기하지 말게.

미국을 믿지 말게나. 저들이 언제 다시 자네와 원수가 될지 알 수 없지. 달콤한 유혹에 홀려 핵무기만 없애 봐봐. 자네는 개밥의 도토리인 것이지.

아, 지금 저 놈의 프랑스 전투기가 또 폭격하는구만. 내 관저도 이미 날아갔지. 지금 난 방공호에 내려가야겠어.
  

자네도 조심하게나. 대대손손 물려줄 것 같던 내 왕국이 한순간에 이 처지가 될 줄 누가 알았겠나. 내일 일은 아무도 모른다네.

내 살아남으면 다시 전화하지. 누가 먼저 죽을 진 알 수 없지만 우리 굳건하게 버팀세.”

  외신기자들 앞에서 두 주먹을 불끈 들어보이고 있는 카다피.

카다피가 김정일에게 전화를 걸어 신세타령을 한다면 이런 이야기를 해주지 않을까.

리비아는 여러모로 북한에 나쁜 선례를 남기고 있다.

올 초부터 중동에 민주화   불길이  일자 북한에도 그 불꽃이 옮겨가지 않을까 하는 장밋빛 기대가 계속 이어졌다. 물론 나도 관련 기사를 썼지만 나는 늘 그런 일각의 기대하고는 거리가 먼 추론을 내놓았을 뿐이다.

언론은 물론 여러 연구소, 학계에서도 “중동 민주화와 북한”이라는 주제의 세미나가 열렸다.

나도 3월 14일 국정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소에서 주최하는 세미나에 토론자로 참가했다. 당시는 카다피가 반격을 시작한 때였다.

이 자리에서도 “리비아 교훈은 북한에 상당히 나쁜 교훈을 주고 있다. 카다피가 반격에 성공한다면 북한 주민들은 ‘아, 우리도 안되겠구나’하고 실망할 것이다. 물론 북한에 아는 사람조차 많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리고 김정일은 힘을 얻게 될 것이다. 특히 반격에 나서는 동안 서방이 팔짱을 끼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힘이 날 것이다”고 역설했다.

지금은 서방이 개입했다. 그렇지만 조건부다. 카다피가 휴전을 잘 지킨다면 폭격은 중단될 것이다. 서방의 개입을 보면서 김정일의 간담이 서늘해질 수도 있지만, 부정적인 결과도 초래할 수가 있다.

가장 확실한 것은 김정일이 리비아를 보면서 핵무기를 포기하면 결국 죽음이라는 생각을  굳히고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북한은 리비아보다 군도 훨씬 방대하고, 무력과 훈련 정도도 훨씬 더 높으며 핵무기가 있고 중국이 버티고 있다.

서방이 리비아 개입에도 저렇게 일치한 모습을 못 보이고, 중국과 러시아는 적극 말리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 김정일은 국제사회가 별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질지도 모른다. 또 시위는 아주 무자비하게 싹을 잘라야 한다고 확신할 것이다

카다피는 지금 김정일은 물론 다른 독재자들에게도 좋은 타산지석이 되고 있다.

 한 배에 탄 독재자들, 왼쪽부터 카다피, 피델 카스트로, 차베스, 김정일 .

이런점을 고려할 때 결국 북한의 변화는 세 가지 시나리오-김정일이 앓아 죽던가, 또는 김재규식 암살이 벌어지던가, 아니면 인민이 일떠서고 군이 합세하든가- 하는 정도로 희망을 걸 수 있지 않겠나 싶다.

물론 나는 두 번째, 세 번째 시나리오에는 점수를 낮게 준다. 우리는 김정일이 고이 앓아 죽을 때까지 과연 방법이 있을까. 김정일이 죽으면 그때는 김정은 체제에선 뭔가 변화는 있겠지 하는
희망만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

삐라 등을 통해 열심히 북한 주민들을 계몽하는 이유는 그들이 이것을 보고 떨쳐 일어나리라는 확신보다는 혹시나 일어설 수 있지 않겠나 하는 희망 때문이며, 또 김정일이 죽은 뒤 김정은 통치가 흔들거리는 순간을 대비해 분노의 불쏘시개를 계속 쌓기 위해서이다. 위키리크스가 들어갈 수 없는 북한에 그 역할을 대신하려는 것이다.

나는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세미나 토론문 끝부분에 이렇게 적었다. 물론 아래엔 당시 쓰지 않았지만 그 자리에서 말하고 싶었던 대목도 일부 포함시켰다.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세미나. 제일 왼쪽이 본인. 그 옆이 김영수 서강대 교수, 고영환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전략정보실장. 사진출처 DailyNK

  “(중략)북한 주민들이 일떠서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여러 설명이 가능하고 모두 다 타당합니다만 저는 현 상태에서 북한 주민들의 궐기를 막는 가장 결정적 장애물은 ‘믿음의 부재’라는 다소 생소한 주장을 하려 합니다.

북한 주민 거의 대다수는 이제는 정권을 신뢰하지도 않고, 이 정권이 빨리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왜 못 일떠설까요.

저는 두 가지 불신이 이들을 가로막고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내가 일떠서면 주변에서 다 따라 일떠설 것이라는 믿음’, 다른 하나는 ‘나의 희생이 헛되지 않는다는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이 없기 때문에 “김정일이 죽을 때까지 어차피 몇 년 안 남았는데 지금까지 참던 것 조금 더 참지 뭐”하고 생각하며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저 역시 위의 두 가지 믿음만 가질 수 있었다면 탈북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더구나 북한은 한번 실패하면 몇 대가 멸족시키는 극악한 체제입니다. 
 

하지만 북한의 치밀한 고발 시스템과 언론 통제는 사람들 간의 교류로 두 가지 믿음을 심어주는 과정을 차단하고 있습니다. 
 

외부에서라도 ‘당신들이 일떠서면 절대 외롭지 않게 적극 지원하겠다’는 믿음을 심어주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의 대북정책은 늘 현상유지를 최선으로 하고 북한의 급작스런 붕괴에 따른 한국의 피해만을 크게 의식해 왔습니다. 이런 정책이 잘못된 것이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정책이든 부작용이 따르니까요.
 

하지만 자연히 그 영향은 북한에도 미쳐 주민들의 믿음은 더욱 꺾이고 있습니다. 
 

저는 궁금합니다. 유엔 사무총장도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지만 그래도 묻고 싶습니다. 
 

지금 북한에서 반김정일 봉기가 일어나면 과연 한국은 개입할 수 있습니까. 나아가 유엔은 리비아와 비교할 수 없는 훨씬 큰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과연 개입할것입니까.   

그렇지않다면 김정일이 수 천, 수만 명의 시위대를 학살하는 과정을 팔짱을 끼고 지켜만 볼 것입니까 아니면 개입하는 척 생색만 낼 것입니까.
 

 ‘남한은 북한 인민의 편에 서서 김정일을 붕괴를 위해 개입할 것이다’고 저는 북한 주민들에게 확신 있게 말할 수 없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북한 사람들에게 온 가족은 물론, 몇 대가 멸족돼도 좋으니 목숨을 걸고 김정일과 싸우라고 말합니다. 이미 그렇게 정치범수용소에서 수십, 수백 만 명이 죽어간 북한 사람들에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