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여러분, 대통령은 나입니다."
7월 16일 오전, 포항 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물리올림피아드.
축사를 하던 대통령이 갑자기 뜻밖의 말을 꺼냈다. 터무니없어서 뜻밖이 아니라 너무나 당연해서 뜻밖인 이야기였다. 사람들의 어리둥절함에는 아랑곳없이 대통령은 여전히 뜻밖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저편에서 영어로 이야기하는 사람은 대통령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대통령은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만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럴수록 사람들의 어안은 더욱 벙벙해졌다. 대통령의 마지막 한마디가 모든 상황을 정리해줄 때까지는.
"따라서 여러분은 영어가 나올 때에도 저를 쳐다보고 있어야 합니다."
순간 장내에 폭소가 터졌다. 물론 대회장에 참석한 외국인들은 대통령의 이 말이 통역될 때까지 영문도 모르는 채 폭소를 유보하고 있어야 했다. 파격이라면 파격이었고, 신선함이라면 신선함이었다. 사람들은 처음 접해보는 대통령의 꾸밈없는 애드리브를 색다른 느낌으로 받아들이는 듯 너나 할 것 없이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순간의 일이었지만, 그것은 참여정부 들어서 변한 대통령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 광경이었다. 대통령이라면 으레 준비된 원고를 엄숙하게 때로는 무표정하게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야 이날 대통령의 한마디가 무척 낯설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광경은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한 이래 수없이 되풀이되어 이제는 거의 상식으로 자리 잡은 파격이었다. 그리고 그 파격 속에서 타성과 고정관념에 쉼 없이 도전하면서 대통령이 추구해온 변화와 혁신의 정신이 깃들어 있었다.
1. 7월 12일 오전 수석·보좌관회의
대통령은 회의 서두에서 행정수도 이전 논란과 관련한 입장을 다시 한 번 분명히 정리해서 밝혔다. 대통령이 언급한 요지는 "정치공세에 대해서는 정치적으로 대응하되 정책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적극 공론화하고 설득하라"는 것이었다. 특히 이날 대통령은 90년대 초반 금융실명제가 갖은 저항을 극복한 끝에 마침내 실시될 수 있었던 사례를 예로 들면서 행정수도 이전의 의미를 의도적으로 왜곡하는 세력의 반대를 정면으로 이겨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런데 이날 대통령이 행정수도 이전 문제와 똑같은 비중으로 언급한 사안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문서속성카드'였다.
대통령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상당히 많은 시간을 할애하면서 그 중요성을 거듭 역설했다. 하나의 문서가 생성되어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게 되었는지, 문서속성카드를 보면 그 역사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통령은 이 문제를 단순한 프로세스의 개선으로 접근하고 있지 않았다. 대통령의 관점은 분명했다. 그것은 '정부혁신'이었다.
대통령은 청와대에 강도 높은 주문을 했다. "청와대가 (업무) 표준화와 합리화에 앞장서야 한다. 그것이 바로 청와대의 몫인 만큼 완벽한 시스템을 갖추어 달라"는 간곡한 당부였다. 대통령은 또 국무회의 운영방식에 대해서도 언급을 했다. 부처가 공유할 수 있고 혁신의 학습효과를 낼 수 있는 것으로, 즉 일종의 성공사례들을 위주로 부처 보고의 주제를 잡아나가자는 주문이었다.
3시간여에 가깝게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대통령은 여러 가지 주제에 대해 상당히 많은 언급을 했다. 행정수도 이전과 균형발전, 문서속성카드, 서열주의 문화의 문제점, 국무회의의 주제와 운영방식 등등. 그날 대통령의 다양한 이야기들은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그것은 바로 '혁신'이었다.
2. 7월 14일 수요일 아침
대통령은 본관으로 등청하면서 혁신관리비서관을 불렀다. 어젯밤 늦게까지 검토했던 보고서에 대한 평가와 보완해야 할 사항들을 직접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대통령은 보고서의 내용에 대해 높은 평가를 내렸고, 정책품질관리 시스템 운영과정에서 성과관리와 가치평가는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과제를 새롭게 제기했다.
일의 방식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를 개선하면서 평가를 해온 대통령이었기에 주변의 참모들이 보기에 결코 낯선 광경은 아니었다. 대통령은 일단 제기한 문제를 그냥 유야무야 넘긴 적이 없었다. 최소한 지시를 위한 지시는 없었다는 뜻이다. 그것이 바로 참여정부 혁신의 근본이었다. 대통령은 아마 5년 내내 혁신을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할 것이다. 틀림없이.
혁신관리비서관이 자리를 뜨고 부속실 직원들이 남게 되자 대통령은 상의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꼬깃꼬깃 접혀진 메모지였다. 그리고는 메모 하나하나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했다. 손바닥만한 크기의 메모지였는데, 거기에는 대통령의 메모가 어지럽게 적혀 있었다. 어지럽다는 것은?
어떤 것은 한 줄의 단어로 깔끔하게, 어떤 것은 옆으로, 그런가 하면 어떤 메모는 뒷면 하단에 거꾸로, 그런 식이었다. 그래서 대통령은 하나하나를 언급하기 위해 메모지를 옆으로 돌려서 보았다가, 다시 접어서 뒤로 돌려보았다가, 또 다시 펼쳐서는 거꾸로 보기를 되풀이하면서 준비해온 생각들을 이야기했다. 혹시 놓쳐버린 것은 없는지 미심쩍었던지 쓰레기통에 한 차례 던져 넣은 메모지를 다시 꺼내 펼쳐보기도 했다.
권양숙 여사의 전언에 따르면 그런 메모들은 모두 TV를 보다가, 때로는 보고서를 보다가 수시로 작성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때그때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단상을 기록하다 보니 그런 형태의 메모지가 만들어지는 듯하다. 아무튼 이날 아침 대통령은 메모지에 다음과 같은 단상들을 담아왔었다.
8·15 연설 때에는 이러이러한 이야기들을 하자. 우리가 쉽게 무의적으로 쓰는 단어들에 대해 다시 한 번 그 의미를 파악해보자. 예를 들면 우리가 '우리'라고 할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민족인지, 국가인지, 아니면 국민인지…. 아무도 선뜻 대답할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제기였다. 아무도 명쾌한 답변을 하지 못했고, 그것은 자연스레 새로운 연구과제가 되었다.
거시적인 안목으로 국정을 바라보는 대통령이 동시에 그토록 미시적인 사안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보면서 놀라지 않을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참모들에게는 익숙한 모습인 그날 아침의 광경은 대통령이 직접 실천하고 있는 혁신의 현장이었다.
3. 계속되는 혁신, 그리고 '자기 실천'
대통령의 혁신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그것은 스스로의 실천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얼마 전 대통령은 청와대를 방문한 몇몇 사람들과 예정에 없이 차 한 잔을 나누며 이야기할 기회를 가졌다. 그 자리에서의 일이다.
참석자들은 자신들이 생활 속에서 우러나는 다양한 문제들을 제기하거나 건의했다. 유기농업을 하는 사람은 유기농 미곡종합처리장(RPC) 건립 건의, 어업 관련 사업을 하는 사람은 고대구리 어업 단속 문제 등등.
대통령은 사전준비가 없었던 탓에 어쩌면 몰랐을 그 주제들에 대해 정확한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한걸음 더 나아가 '고대구리'의 정확한 표현은 '기선저인망 불법어로 문제'임을 분명히 하기도 했다.
혹자는 대통령이 폭넓게 지식을 체득하게 된 요인을 뛰어난 학습력으로 추론하기도 한다. 그 말도 물론 틀리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요인은 다른 곳에 있다. 바로 그것은 모두 국정운영의 책임을 진 대통령의 자신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대통령은 몇몇 참모들이 있는 자리에서 언론의 여러 보도를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했었다.
"나는 그 기사들 하나하나가 안 아픈 것이 없다."
바로 그러한 자세로 각종 사안에 대해 참모들과 끊임없이 토론을 거듭하고 보고서를 검토했기에 국정 전반을 소상히 파악하고 있는 오늘의 대통령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은 자신이 내용을 소상히 알고 있다 해서 모든 결정을 독단적으로 하지 않는다. 혹여 있을 수도 있는 잘못된 결정을 최대한 피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대통령의 결단이 필요한 때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안들에 대해 그 결정과정을 가급적 시스템에 맡기는 것이다.
4. 사고의 전환, 새로운 변화
대통령은 오늘도 끊임없이 사고의 전환을 역설한다. 특히 수도권 중심 사고를 벗어나 지방이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 나가야 한다는, 사고의 전환을 거듭거듭 이아기하고 있다. 낙후지역 개발 문제를 다룬 15일 국정과제회의에서도, 그 다음날 포항에서 열린 지역혁신협의회 회의에서도 대통령은 참여정부 균형발전 전략의 토대가 되고 있는 혁신의 철학을 진솔하게 표현했다.
"자원을 투입할 때에는 성공이 확신되는 쪽에 투자를 집중하겠다."
"기존 사업도 성과가 검증되지 않으면 돈을 쓰지 않는다. 불용액으로 남는 한이 있어도 성과 있는 것에만 지원하겠다."
"이제는 지방이 주도하고 중앙이 지원하는 체계로 간다."
"옛날에는 대통령이 이렇게 내려오면 지시를 내리고 지역사회에 선물을 주었지만, 이제는 지역혁신협의회가 어떻게 토론하고 논의하는가가 더 중요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과 그 지역 스스로의 노력이다."
"더 이상 수도권을 쳐다보지 말고, 지방발전의 창의적 전략을 제출해 달라."
"창을 열고 크게 바라보자."
이렇듯 대통령은 쉼 없이 파격 또는 새로운 변화에 앞장서고 있다. 며칠 전 한·일정상회담 준비상황을 보고받는 자리에서의 일이다. 준비팀이 보고하기를 이번 회담은 전 행사가 노타이로 진행된다고 했다. 대통령은 특유의 애드리브로 다시 한 번 좌중을 웃겼다.
"난 넥타이를 안 매면 인물이 죽는데…."
윤태영(제1부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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