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은 잘못은 자신이 저질러 놓고 책임은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책임전가의 달인’이다. 북한에서는 사소한 일이라도 김정일의 명령이 없으면 이를 실행할 수 없다. 그러나 일이 잘 못되면 모든 책임은 실무자가 져야한다.

북한이 남북대화에 나섰거나 남북대화를 담당하고 있던 대남 협상 파트너 30여 명을 제거했다고 한다. 그 중 10여 명은 총살로, 20여 명은 교통사고로 죽였거나 행불자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궁금증이 생긴다. 왜 정리 대상이 남북대화 담당자들이냐는 것이다. 북한이 대남 협상력을 키우려면 설사 그들이 큰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보호하는 것이 원칙일 터인데 왜 목을 날렸느냐 하는 점이다.

김정일은 그 동안 자신의 권력기반을 다지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내쳤다. 우선 1974년 당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정치위원으로 선출돼 후계자로 결정된 이듬해 그는 계모 김성애와 이복동생 김평일 등 이른바 ´곁가지´를 모두 쳐냈다. 이어서 권력 장악 과정에 걸림돌로 될 만한 세력들을 모조리 없앴다. 그리고 지금도 숙청은 계속되고 있다.

숙청 대상은 반드시 권력 장악 과정의 걸림돌로만 한정되지 않는다. 국가정책 실패에 따른 자신의 권위 손상을 막기 위해 관련 부문 일꾼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제거하기도 한다. 지난해 6월 문일봉 전 재정상을, 이보다 앞선 지난해 3월 경제 사령탑이던 박남기 노동당 재정부장과 김태영 부부장 등에게 화폐개혁 실패 책임을 들씌워 처형한 것이 그 같은 사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동안은 대부분의 숙청 대상자들이 경제부문 일꾼들로 경제정책 실패 책임이 물어져 처형됐으나 이번에는 유례 드물게 남북대화 책임일꾼들이 숙청됐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북한은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남북대화에 매달렸다. 2009년 8월 고 김대중 전 대통령 조문으로 서울에 온 북한 대표단이 이명박 대통령에게 대화를 요청했던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북한은 올해 들어서도 남쪽을 향해 구걸하다시피 대화를 요구했다. 천안함과 연평도 도발로 남북관계를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게 한 이후에도 남북대화에 안달했다.

그러다 지난 4월 말에는 평양을 방문한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을 통해 남북정상회담을 제안했다. 김정일의 제안은 두 가지 목적에서였다. 하나는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위한 북미회담이었고, 다른 하나는 1년 앞으로 다가선 ‘강성대국’ 진입을 위한 남쪽으로부터의 지원 획득이었다.

김정일은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위한 북미회담을 갈망해왔고 지금도 갈망한다. 그러나 미국은 ‘선 남북대화 후 북미회담’을 요구한다. 이에 김정일은 미국과의 대화 조건 충족을 위해 남북정상회담을 요구했다. 한국을 경유해 미국으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로서의 남북대화 요구였다. 아울러 내년 김일성 탄생 100주년 겸 ‘강성대국’ 진입 잔치에 쓸 돈을 남쪽으로부터 지원받기 위해 남북정상회담을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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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속셈에서 남쪽과 비밀접촉을 갖고 정상회담을 추진했다. 그런데 남쪽에서 천안함과 연평도 도발에 대한 북측 사과를 불퇴전의 조건으로 제시했다. 북측 대표들은 과거처럼 억지를 부리면 남쪽에서 어느 정도 양보할 줄 알았다. 그러나 남측 요구는 단호했다. 과거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와는 달랐다. 거기에서 북측 대표들은 실망했고 좌절했다.

그러는 사이 김정일이 베이징에서 원자바오 중국 총리를 만나고 보니 그가 도쿄에서 이명박 대통령으로부터 남북 비밀접촉 내용을 상세히 들어 알고 있었다. 중대한 국가기밀을 제3자가 알고 있다는데 대해 김정일은 분노했다. 이명박 정부로부터 경제지원을 얻는 것도 가망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못 먹는 감 찔러나 보겠다’는 심술로 비밀접촉 내용을 공개했다. 그리고 남북정상회담 추진 실패 책임을 물어 대남 협상 파트너들을 희생양으로 제거했다.

전형적인 김정일의 책임전가 수법이다. 그는 항상 그런 식이었다. 2009년 11월 단행한 화폐개혁 실패로 주민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이를 잠재우기 위해 박남기 당 계획재정부장과 김태영 부부장을 희생양으로 지난해 3월 10일경 당 부부장급과 각 성 부상급 이상 고위층이 지켜보는 앞에서 총살했다.

이보다 앞서 식량난이 극심했던 1997년에는 농업정책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서관희 노동당 농업담당 비서를 공개처형 하는 등 실정(失政) 책임을 간부들에게 떠넘겨 왔다. 잘못은 김정일 자신이 저질러 놓고 책임은 다른 사람에게 떠넘긴 것이다.

소식통에 따르면 요즘 북한 고위 관료층 사이에 복지부동 풍조가 팽배해 있다고 전해진다. 1년 앞으로 다가온 2012년 ‘강성대국’ 진입 실패 조짐이 속속 드러나고 있는 시점에서 함부로 나섰다가는 모든 책임을 자신들이 뒤집어쓰면서 ‘제2의 박남기’로 된다는 위기감에서 나온 몸 사리기다.

북한은 내년을 ´강성대국‘ 진입의 해로 (수)정하고 상징적으로 평양 살림집 10만호 건설과 류경호텔 재건 사업을 추진하고 있지만 공사 진척이 지지부진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동안 김정은이 주도하고 있는 것으로 선전해 온 공사가 그 지경이니 그의 위상 추락을 걱정한 당국이 책임전가를 위한 희생양을 고위 관료층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내년엔 또 한바탕 또 피의 숙청 광풍이 불어 닥칠 전망이다.

소식통에 따르면 김정일의 매제 장성택도 제2의 박남기가 될 것이라고 전해진다. 현재 장성택은 북중 경제협력과 함께 후계 작업과 평양시 현대화 공사 등 대형 국책 과제를 주도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과의 경제협력을 제외한 나머지 과제에서 부진을 면하지 못해 머지않아 숙청될 것이란 얘기다.

국외자들은 장성택이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것으로 보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의 권력은 매우 제한적이며 김정일과 김정은 측으로부터 심한 견제를 받고 있다. 최근 장성택이 극도로 몸을 낮추고 있는 것도 다 그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가 언제까지 몸을 낮추고 있을 인물이 아니다. 그에게도 꿈이 있고 야심이 있다.

소식통에 따르면 장성택 측근들이 최근 들어 북한 고위 관료들이 평양 10만호 건설 실패 책임을 물어 엄한 문책을 당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복지부동하고 있다는 얘기를 장성택에게 전하면서 “당분간 앞에 나서지 말라”고 간하고 있다 한다. 앞날을 도모하기 위해 제2의 박남기가 되지 않도록 미리 대비하라는 뜻이다. 그러나 김정일과 김정은이 이를 모를 리 없다. 하여 때가 되면 숙청의 일진광풍이 휘몰아칠 전망이다. 그 때가 언제인가? 바로 내년이 아니겠는가.

이래저래 북한에서는 피의 숙청바람 단 하루도 잘 날이 없다. 김정일이 그 동안 공언해온 내년 강성대국 목표가 실패로 결말날 경우 불어 닥칠 숙청의 칼바람은 상상을 초월할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그것이 북한 내부에서 끝나지 않고 북한 권력층 내부 갈등과 주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극단적인 대남 도발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부는 북측 동향을 예의주시하면서 정치(精緻)한 대응책을 세워 사전 이를 분쇄해야 한다.

글/김영명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