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金, 김씨 왕조 막 내리고 軍部집단지도체제로 갈 듯”
[외국인 칼럼] 피터벡
[외국인 칼럼] 김정일 그 후, 김씨 왕조 막 내리고 군부 집단지도체제로 갈 듯
몇 년 전 밝고 호기심 많은 북한 가이드와 대동강변을 함께 거닐면서 남한의 일상생활부터 외부세계에 비친 북한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자유롭게 토론의 꽃을 피운 적이 있다.
목소리가 닿을 만한 거리에는 우리 말고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내가 ‘미스 김’에게 “김정일 위원장이 죽었을 때 누가 그 권력을 대신할 것 같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표정이 얼어붙으며 “그런 질문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답했다.
김정일 위원장의 건강 이상에 대한 최근의 보도들은 그가 사라졌을 때 북한에서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숙고하게 만든다. 김정일 위원장은 지금 시점에서 건강 회복을 위해 노력하는 것 이상으로 어떻게 하면 후계자에게 권력을 원만하게 이양할 수 있을지에 지대한 관심을 쏟고 있을 것이다.
그에겐 자신이 받아든 선택지가 결코 즐겁지만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권력을 장악할 가능성이 큰 군부가 압도적인 권력을 휘두르지 못하는 그의 친족 구성원 중 한 명이라도 필요로 할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가 최소 향후 10년간 건강하게 살 수 없을 경우 ‘김씨 왕조’는 막을 내릴 것으로 보인다. 김정일이 세 명의 아들에게 권력을 넘길 준비를 하고 있다는 징후는 어디에도 없다. 김정일 스스로는 30대에 이미 ‘선택받은 인물’이 됐고 20년간 아버지의 죽음에 대비를 해왔다.
김정일의 큰아들 김정남(37)은 2001년 일본에 잠입하려다 들키기 전까지 마카오에서 인생을 즐겼다. 20대인 나머지 두 명의 아들은 더 은둔의 삶을 살아왔다. 10년 전 스위스의 스키 슬로프를 내려온 이래 둘째 김정철이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록가수 에릭 크랩튼의 유럽 공연장을 쫓아다닌 것이 유일하다.
세 번째 아들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더욱 없다. 가장 충성스런 장군일지라도 지도자 동지 아들들의 이 부적합한 삶 때문에 고통을 겪을 것이 분명하다. 어느 단계에서는 대를 이어갈수록 유전적인 요소가 개선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을 것이다.
피델 카스트로처럼 ‘방계 후계자’가 그나마 실현성이 있어 보이는 대안이다. 이복동생 김평일의 경우 20년 전 유럽으로 추방됐고 일련의 대사직을 거쳤다. 여동생 김경희는 노동당 내에서 직위를 갖고 있고 최고인민위원회에서도 일해왔다. 하지만 지난 10년간 공개석상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단 세 차례뿐이다.
김정일 위원장은 지난 20여년간 그의 개인비서 역할을 해온 김옥과 결혼했다는 소문에 휩싸여 있지만 2000년 조명록이 클린턴 대통령을 만날 때 동행한 것 외에는 정작 그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이 친족들 중 누구도 마오쩌둥 사후(死後) 4인방을 구성했던 마오의 부인 강청과 같은 실력은 없어 보인다.
친족 구성원 중 권력 승계 구도에서 성공적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남아있는 사람은 김정일의 매제 장성택으로 보인다. 그는 2004년 실각하기 전까지는 노동당 내에서 떠오르는 스타였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공부했고 김정일의 해외여행 몇 차례 때도 동반했다. 무엇보다 그는 테크노크라트로서의 명성을 쌓아왔다. 2002년 남한 경제 시찰을 위해 서울을 방문했을 때 그를 수행했던 한 친구는 그가 꽤 능력을 갖춘 인물로 보였다고 말했다.
2006년 그는 말 그대로 다 죽었다가 살아났다.(그가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는 현재 국내 치안을 담당하고 있다. 군부에 이렇다 할 배경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 가장 큰 취약점으로 꼽혀 왔지만 그의 큰 형이 인민군 장성이다.
김정일의 이너서클을 자세히 들여다보더라도 그의 선택은 여전히 불확실하다. 지난 9월 9일 열린 건국 60주년 행사에 참석한 권력서열 20위권 인물들의 평균 나이는 거의 80세다. 사실상 국가 수반인 김영남(80)은 이 그룹의 상징이다.
지난 7월 김영남을 만난 한 서방 외교관은 나에게 “김영남이 다방면에 걸쳐 관여하고 있지만 나이가 많다”고 말했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김정일이 무력화될 경우 임시 관리인 정도의 역할에 머물 것으로 보인다. 경쟁자의 부상을 막도록 설계된 북한의 권력 시스템 자체가 리더십의 승계를 원천적으로 어렵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인물이나 그룹이 ‘포스트 김정일 정부’를 이끌지 정확히 식별하긴 어렵지만, 제도적인 킹 메이커나 비토 그룹은 명백히 존재한다. 북한과 같은 전체주의 정권에서 군이나 보안 기구들은 지배권을 휘두를 수밖에 없다.
이번에 김정일이 쓰러지기 전 공개적으로 방문한 14곳 중 11곳이 군 관련 시설이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김정일은 많은 직책을 갖고 있지만 가장 앞서는 것이 국방위원장이다. 그의 권력은 바로 이를 통해 구현된다고 할 수 있다. 국방위원회의 원로들은 중앙군사위원회나 인민보안성, 노동당 등 다른 핵심 기구들에도 중요 직책을 갖고 있다.
김정일을 비롯한 이러한 멤버들과 얼마나 가까우냐가 북한에서는 권력의 잣대가 된다. 권력 승계 메커니즘의 부재와 새로운 기아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북한 체제가 견고한 것은 이러한 배경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국방위원회와 같은 북한의 집단 리더십 내에서 명백한 분파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앞으로 권력 승계가 어떻게 진행될지에 대해 강한 힌트를 준다. 리더십 내부에 특정 개인이나 지역·이념에 기반을 둔 그룹도 부각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북한은 군벌이 난립하는 것과 같은 상황은 맞지 않을 것 같다.
리더십 내부에서의 불충(不忠)은 불의의 죽음이나 강제수용소행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아무도 이 견고한 틀을 벗어날 것 같지 않다. 군부의 원로 장성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군부에서 막강한 권력자가 등장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박정희나 전두환 모두 40대에 군부의 실력자가 됐지만 그들이 쿠데타를 감행하기 전까지는 바깥 세계의 누구도 그들의 존재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80줄의 원로들을 제외하고 우리가 북한 군부에서 제대로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손’을 따르는 새로운 철권 통치야말로 북한에 최선의 시나리오일 수 있다.
김정일의 중국 방문을 수행했던 북한 군부 지도자들은 성공적인 경제 개혁이 뭐라는 것 정도는 아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행하게도 북한은 남한이나 중국보다는 미얀마의 예를 따를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군부 집단지도체제가 출현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새로운 집단 지도부에 누가 추가되고 누가 배제되는지를 가리기 위해서는 수개월, 혹은 수년이 걸릴 것이다.
북한 군부는 확실히 운전석에 앉아 있는 상황이다. 그들이 과연 김정일 친족들을 장식품으로 쓸 것인지 말 것인지가 남은 궁금증일 뿐이다.
북한이 이미 내부로 단단하게 웅크리기 시작했다는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6자 회담은 지연되고 있고 남북 관계는 이명박 대통령의 계속된 제안에도 불구하고 냉랭한 상태를 이어가고 있다.
슬픈 현실이지만 이 와중에 궁극적인 패자는 북한 주민들일 수밖에 없다. 운 좋은 몇몇 주민들만 자신들의 운명에서 빠져나올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 피터 벡 | 미국 캘리포니아 출생. UC버클리대 졸업. 캘리포니아대 국제관계 및 태평양연구대학원 박사 과정 수료. 워싱턴 한미경제연구소 실장, 국제위기감시기구(ICG) 서울사무소장, 미국 북한인권위원회 사무국장 역임. 현 연세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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