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2월 7일.
춘천 102 보충대로 입영하는 너에게 엄마는 정완영 선생의 시 <조국>을 들려주고 싶다.
엄마가 네 나이였을 때, 조국은 유신으로 비롯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었다.
그 힘든 역사의 질곡을 걸으면서
정완영 시인의 <조국>을 가슴으로 읊으며 눈물짓던 내 청춘의 한 시절이 기억되는구나.
그랬다.
그 시절의 내게 있어서 유신의 조국은
행여나 다칠세라 숨 죽여 안아보는 가얏고였다.
내 조국은 통곡 다 하지 못해 피멍 든 하늘을 가슴에 담고
아, 말 없이 학처럼 여위어 가던 슬픈 나라였다.
그 안타까운 조국의 현실 앞에서
조국을 향한 사랑으로 눈물을 글썽이던 처녀 아이가 이제 어머니가 되었으며,
그녀의 아들은 조국을 지키는 파수꾼이 되는구다.
나는 조국을 위해 청춘의 한 자락을 바치는 내 아들이 자랑스럽다.
나는 이제 비로소 너로 인해 자랑스럽고 당당한 조국의 어머니가 되었구나.
이 나라에서 조국을 위해 젊음의 한 자락을 헌납하는 청년보다
장하고 아름다운 아들이 어디 있을 것이며,
어느 어머니가
조국을 위해 그 아들을 떠나보내는 여인보다 당당하게 아름다울 수 있으랴!
조국을 위해 내 아들을 떠나 보내는 나는 감히 묻고 싶다.
이 땅에 누가 있어,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하게 키운 아들을
조국을 위해 떠나 보내는 어머니처럼 당당하게 아름다울 수 있느냐고.
네가 102 보충대로 배치되었다는 입영통지서를 받고 나서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102 보충대 홈페이지로 들어간단다.
오늘은 아예 회원으로 가입까지 하고 말았지.
군복무 신조를 꼼꼼하게 읽어보고,
내무 생활의 목적이며, 병영 생활의 행동강령을 외우기도 하고
20개 가량 되는 군가를 듣기도 하였다.
모든 것이 나에게는 너무나 생소했지만,
내 아들이 군생활을 하는 2년 동안 지켜야 할 수칙이며, 내 아들이 외어야 할 것들이며,
내 아들이 불러야 할 노래들인 것을.
조국이 있는 곳에 우리가 있고 우리가 있는 곳에 충성이 있다
청춘의 끓는 피 불태우며 충성을 맹세한 나의 전우야
조국의 산하를 누가 지키랴 너와 내가 아니면
조국이 있는 곳에 겨레가 있고 겨레가 있는 곳에 영광이 있다.
<조국이 있다>라는 노래를 들으며
엄마는 울음을 터뜨렸단다.
조국의 아들, 영빈이가 자랑스럽고 고마워서
그러면서도 가슴이 메이더구나.
그래, 조국의 아들 영빈아.
위의 노래말처럼 조국이 있는 곳에 너와 엄마를 비롯한 겨레가 존재할 수 있단다.
청춘의 끓는 피 불 태우면서 조국을 위한 충성을 잊지 말고
우리들의 조국을 지켜다오.
너희 청춘들이 이 조국의 산하를 지키는 아름다운 희생.
고맙고 또 고맙구나.
너희들이 아니면 누가 우리 조국을 지켜주리.
너희들의 그 거룩하고 아름다운 희생 속에서 이 에미는 평화와 자유를 누리지 않겠니?
조국을 지키기 위한 훈련이 때론 고되고 힘들겠지.
때론 인생의 가장 아름답고 푸른 시절의 2년을 국가에 바친다는 사실에
화가 나기도 하고, 어떤 회의를 느끼기도 하겠지.
그러나 조국의 자랑스런 아들, 영빈아.
너희들의 소중한 청춘의 일부분을 조국에 헌납하는 숭고하고 아름다운 희생의 댓가를
그 어떤 가치에 비유할 수 있을까?
어떤 가치가 조국을 위해 청춘을 헌납한 너희들의 젊음보다 아름다울 수 있을까?
에미는 감히 말한다.
국가를 위해 너희 청춘을 바치는 그 희생이야말로
이 땅에서 무엇보다 값지고 소중한 것이라고.
내 자랑스런 아들 영빈이는
조국의 아들로서 모든 어려움을 굳건하게 견디어 내리라고 이 에미는 믿고 또 믿는단다.
-디지털 화가 오진국 선생님(필명Daniel)의 鶴-
네가 커갈수록 나는 분단된 조국의 현실이 너무나 안타까웠단다.
전후세대인 에미는 전쟁의 아픔을 짐작하기만 할 뿐,
분단된 조국의 현실이 그다지 실감나지 않았지.
그러나 내 두 아들이 성장할수록 나와는 그다지 관련없게 생각되던 <통일>의 문제가
절실하게 다가 왔단다.
<통일>이 되면 내 두 아들은 군에 가지 않을 것이라는
모성의 본능으로 나는 간절하게 <통일>을 바라게 되었단다.
어느 정치가 자제의 병역문제가 이 땅에서 가장 뜨거운 쟁점으로 떠올랐던 적이 있다.
그때 나는 그 분의 심경을 충분히 이해할 것 같으면서도
도저히 그분을 용납할 수 없을 것같기도 했다.
때가 되면 내 아들을 당연히 조국에 바쳐야 한다고 생각해온
이 땅의 평범한 어머니로서의 나는 가진 자들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아들을 군에 보내지 않으려고 몸부림하는 당시의 사회현실이 가증스러웠다.
그러면서도 나는 할 수만 있다면 내 아들도 군에 보내고 싶지 않았지.
이 무슨 아이러니란 말인가.
내가 친구에게 어떤 이야기를 전해들은 뒤부터는
네가 자랄수록 엄마는 한숨을 쉬곤 했단다.
어디까지나 전해 들은 이야기이기에 그 진위를 알 수 없다만
엄마는 남의 이야기로만 생각할 수 없었단다.
아들을 군에 보낸 어느 여인의 이야기란다.
그 여인은 엄마에게 이야기를 들려준 친구의 고향 선배란다.
저녁밥을 짓다가 어떤 느낌 때문에 고개를 돌려보니부엌문에 자신의 아들이 서 있더란다.
처음에 그 여인은 꿈이 아닌가 했단다.
군에 있어야 할 아들이 부엌문 앞에 서 있었으니,
다른 사람들도 그런 상황에서는 꿈을 꾸고 있겠거니 했겠지.
-아니, 네가 무슨 일이니? 휴가 온다는 연락도 없었는데......
그 여인이 끝까지 놀랄 새도 없이 이내 헌병들이 그 집을 들이닥쳤을 때,
여인은 모든 것을 짐작했단다.
-지금 저녁밥을 짓고 있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셨다가 우리 아들에게 밥이라도 먹이게 해 주세요.
여인은 헌병들에게 눈물로 애소하였다더구나.
헌병들은 그 군인이 저녁밥을 먹도록 허락했고,
마음이 급한 여인은 채 뜸도 들이지 않은 밥으로 저녁상을 차렸으며,
밥을 먹은 아들은 헌병들을 따라 갔단다.
탈영한 아들을 그렇게 보내고 난 그 여인의 심경이 어떠하였을까?
그 여인의 지옥을 나는 이해할 것 같았단다.
그리고,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서 그 여인은
그렇게 떠나간 아들이 목숨을 끊었다는 연락을 받았단다.
아, 내 새끼가 군법회의에서 재판이나 받고 죽었다면 덜 억울하겠다고
통곡을 하였다던 그 여인.
생떼같은 제 자식을 잡아먹은 이 나라를 원망하고 또 원망하고,
이를 갈고 이를 갈았다던 그 여인.
살아 있으면서도 죽은 목숨이던 그 여인의 오열과 통한과 분노를 들으면서
엄마는 하루라도 빨리 통일이 되기만을 바랐단다.
민족과 조국을 위해서가 아니었지.
통일이 되면 내 새끼들이 군에 가지 않게 되리라는 어리석은 희망 때문에
이 에미는 그렇게도 간절하게 통일을 염원했다.
그것은 제 새끼를 지키고 싶은 모성의 동물적 본능이었으리라.
나는 조국과 민족보다 내 새끼의 안위가 더 소중했단다.
돈이나 권력으로 자식들을 군에 보내지 않은 사람들이 부러웠고, 미워지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그러나 이제 어미는 조국의 부름을 받은 내 아들을 자랑스럽게 바라본다.
조국의 자랑스런 아들이며, 내 사랑스런 아들 영빈아.
위에서 말한 불행한 여인과 그 아들의 이야기는
결코 남의 이야기로 생각해서는 아니 될 것이야.
우리, 잠깐 생각해 볼래?
그 청년은 힘든 군생활에서 어머니가 그리운 마음이 너무 강해
순간적으로 자신을 제어할 수 없었기에
자신은 그토록 불행한 죽음을 맞았을 뿐 아니라,
어머니에게도 세상에서 더 이상 잔인할 수 없는 지옥을 안겨 주지 않았겠니?
사나이로 태어나서 아무리 힘든 일이 닥쳐도 우리 영빈이는 잘 헤쳐나갈 수 있겠지?
엄마는 우리 영빈이가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의 자랑스런 아들로
그리고 이 에미의 소중한 아들로서 그 모든 어려움을 씩씩하게 견디어 내리라 믿는다.
어느 날, 갑자기 그 사람 떠났다.
그 사람의 죽음에 대한 예고도, 예감도 없었다.
49재를 지내던 날.
스님들의 점심 공양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시간.
내게도 식사를 권유했지만 그 사람 보내고 나서 맥주 캔 하나로 버티어 온 날들.
그냥 법당에 남는다.
그런데......
49재를 지내면서 사용하는......
오색의 긴 비단천들이 화려하게 늘어진 그것들을 붙잡고 장난을 치면서 법당 안을 뛰어다니는......
너무나 어린 두 아들의 웃음이 맑아서......
그 웃음이 내 가슴을 난도질하고 있어서......
법당 밖으로 나왔다.
법당 앞에는 두 그루의 백목련이 있어서 내 소복의 빛깔같은 꽃들.
피어 있었다.
망연하게 꽃 그늘 아래 앉아 있었다.
49재가 끝나고, 법당 앞의 목련꽃같은 빛깔의 소복을 벗어던진 그날부터......
나의 여행은 시작되었다.
두 아들을 르망의 뒷자석에 싣고 무조건 산을 향해 달렸던 길.
산세 험한 곳을 만나면, 낭떠러지를 향해 모질게 핸들 한 번 꺾어 버리려고......
주변에 다니는 차들이 많아서,
뒷자석에서 장난을 치고 깔깔거리는 두 아이들의 웃음 때문에......
자신들과 함께 죽으려는 에미의 독한 마음도 모른 채
쌕쌕거리면서 잠든 두 아들의 숨소리가 너무나 평화로워서......
핸들을 꺾지 못하고 돌아오던 길에
피눈물같은 진달래와 철쭉이 차례로 피었다 지고,
신록이 꽃보다 눈부시었으며......
구절초와 산국은 작은 바람 아니 불어도 눈물 속에서 흔들렸다.
주말이나 휴일이면, 산세 험한 길이라도 만나면 핸들 한 번 모질게 꺾어 버리려고
무조건 산을 향해 떠나면서 전국의 산을 헤집고 다녔던
나의 슬픈 여행은
.
.
.
세상 속에 버려진 우리 세 母子.
모두 함께 죽는다면 더 이상 축복이 없겠지만......
누가 한 사람이라도 살아남는다면......
한 사람만 죽게 된다면......
죽지도 못하고 병신이 되어 목숨을 부지하게 된다면......
어느 날 갑자기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에가지 생각이 미치자
극도의 공포심이 몰려오면서 나의 슬픈 여행도 겨울이 오기 전에 끝이 났다.
살기로 했다.
영빈이가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는 살기로 했다.
그날부터 난 영빈이의 스무 살을 기다렸다.
매일 밤 손가락을 꼽으면서.....
처음에는 내 두 손을 사용해도 많이 모자랐다.
그러다가 두 손만 사용하게 되었을 때의 기쁨.
3,4,5,6학년 중1,2,3,학년, 고1,2,3,학년.딱 10년 남았네.
이제......10년만 있으면 우리 영빈이가 대학생이 된다.
그때까지 기다리자.
4,5,6학년 중1,2,3,학년, 고1,2,3,학년.
이제...... 9년만 기다리면 우리 영빈이가 대학생이 된다.
그때가지 기다리자.
영빈이가 대학생이 되면......
난 삶과 죽음에 있어서도 자유로울 것 같았다.
설혹 내가 죽는다고 해도, 대학생이 된 영빈이가, 장부가 된 영빈이가
두 개의 아파트와 내 퇴직금과 약간의 저축으로
공부도 하고, 동생 형주도 잘 보살필 것 같았다.
*년만 기다리면 우리 영빈이가 대학생이 된다. 스무살이 된다.
난 내 삶의 주문을 외우듯, 거의 매일 밤을 그렇게 손가락을 헤아리고 헤아리다 잠들었다.
이 세상 속에 우리 세 母子만 덩그마니 버려졌다고 생각하였던
그 시절의 나를 붙들어 주던 마법의 주문.
*년만 기다리면 우리 영빈이가 대학생이 된다. 스무살이 된다.
그러다가 두 손을 한 손만 사용하게 되고.
고2에 올라가면서는 손가락을 사용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우리 영빈이는 재작년에 대학생이 되었다.
그렇게 죽음을 기다렸던 나는 이제 죽음을 두려워한다.
영빈이가 대학생만 되면 내가 할 일도 다 끝날 줄 알았는데......
두 아이를 위해서 해야 할 일들이 내겐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나는 그 동안 두 아이를 위해 내 목숨을 지탱하여 왔는가?
그런 것도 같고, 그렇지 않은 것도 같다.
그러나 난 이제 살아야 한다.
<2005년 1월 깊은 산속의 폭설 속에서 교통사고가 났을 때 적었던 일기에서>
위의 글은 지난 해의 이맘 때쯤 엄마가 솔방에서 돌아오던 길에
폭설 속에서 교통사고가 났을 때, 적었던 글이다.
그랬다.
네 아빠가 떠나고 난 뒤에 에미도 함께 이 세상을 떠나고 싶었다.
그런데 에미에게는 너와 형주가 있었지.
너와 형주 때문에 억지로라도 살아 남아야 했던 세상.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이 세상은 살아가면서 누려야 아름다운 가치들이
산재해 있더구나.
세상은 이토록 보배로운 것을......
당장의 고통과 슬픔을 견디기 힘들어서 다른 생각을 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영빈아.
물론 너는 모든 어려움을 슬기롭고 씩씩하게 견디리라 믿는다.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너의 빛나는 미래를 위해,
지아비를 잃은 고통 속에서도 어린 두 자식 때문에,
'*년만 기다리면 우리 영빈이가 대학생이 된다.'는 주문을 마법처럼 외우면서
가시밭길을 헤쳐 온 이 에미를 위해,
동생과 할머니 할아버지를 위해,
그리고 젊은 너희들의 어깨에 그 운명이 달린 조국과 겨레를 위해
꿋꿋하게 견딜 수 있겠지?
그래, 조국은 청춘의 한 시절을 바쳐서 지켜야 할,
아니 한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야 할 가치를 충분히 지니고 있다.
조국을 지키는 일은
나를 지키는 일이며, 내 부모 형제와 겨레를 지키는 일이고
나의 행복과 영광뿐 아니라 그 빛나는 미래를 약속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소중한 역할을 하게 된 내 아들이 이 에미는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른단다.
조국의 자랑스런 아들이며
동시에 내 소중한 아들 영빈이가
그 의무를 당당하고 아름답게 마치고 돌아오기를 이 에미는 기뻐하면서 기다리련다.
아, 소중하고 자랑스런 내 아들.
이렇게 씩씩하게 잘 자라 조국을 지키는 그 아름다운 일을 하게 되어 그저 고맙기만 하구나.
2006년 2월 7일 내 아들 영빈이와 함께 102 보충대로 입대하는,
그리고 이 나라 이 곳 저 곳에서 국방의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장하고 또 장한 조국의 모든 아들들에게 무한한 영광과 축복이 있기를 바라면서
아자, 아자, 화이팅!
위의 글 속에 나오는 유신이라던가,
어떤 정치가 자제분의 병역기피 쟁점에 관한 내용은
정치적인 의도가 전혀 없음을 밝힙니다.
그저 이 땅에서 살고 있는 한 여자가 느낀 역사의 질곡과
사회 현상에 관한 내용입니다.
저는 정치적인 어떤 현상에 관해서는 그다지 관심도 없고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을 뿐더러,
지금은 자식의 군입대를 앞둔 에미로서 적은 글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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